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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탁월한 남자

postever 2011. 6. 17. 14:46
'요조'가 쓴 글.
재밌네.ㅎㅎ



#1.
그것은 지하철 안에서였다. 아마도 26살 때.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지하철을 탈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지하철을 굉장히 애용했었고 또 그 문화를 사랑했었다.
이를테면 지하철 칸을 오고가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물건을 적극적으로 구매했을 뿐 아니라
가끔 지하철 안에서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비범한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몇월. 몇일. 몇시. 1호선. 한 남학생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님.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끝에서 끝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왕복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됨.
교복을 입고 있으나 어느 학교인지 잘 모르겠음.'
이런 식으로 기록노트를 쓰기도 했었다.
그 날은 사람이 많았다. 4호선이었던 것 같다. 덜컹거릴 때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묵직한 사람들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되는대로 손잡이라도 하나 잡고 싶어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 때 내 앞에는 어떤 남자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있었는데 딱 내가 잡았으면 좋았을 법한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마침 지하철 안은 또 한 번 흔들거렸고 나는 다시금 추하게 비틀거리며 괜히 분한 기분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노려보다보니 그 남자의 뒷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짐작컨데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단정한 어두운 색 수트를 입고 있었고 왼손으로 들고 있던 서류가방도 명품은 아니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가죽브랜드의 그것이었다.
물론 나는 평일에 서류가방을 들고 수트를 입는 일을 하는 남자를 만난 적도 없고 별로 흥미도 없었지만,
그 남자는 서 있는 모습도 그렇고 어딘지 믿음직해 보이는 데가 있었다.
나는 초반의 노여움을 서둘러 거두고 아무것도 모르고 서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이리저리 관찰하며 시간을 떼우기 시작했다.
키는 내가 기분 좋게 올려다 볼 수 있을 정도, 유난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
동그랗고 예쁘게 생긴 뒷통수, 덜컹거릴 때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가 하는 것도 잠시 지켜보았다가..
그러다가, 그의 귀를 보았다. 왼쪽 귀의 뒤쪽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내 마음가짐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연신 궁금해 하며 응큼하게 그의 뒷모습을 훑던 나는 그 점을 보고 나자,
더 이상 그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았다.
뭔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그 점만 보였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왠지 충분히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하기까지 했다.
얼마간의 시간 뒤, 그는 인파를 조심조심 헤치며 출입문 쪽으로 나아가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를 따라갈까, 다짜고짜 일단 말이라도 걸어볼까,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문은 너무 빠르게 다시 닫혀버렸다.
구우웅-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그리고 나는 이제 그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2.
며칠 전 아침에는 너무 쓸데없이 일찍 일어났다. 그래서 DVD로 영화를 봤다.
'비포 선 라이즈'.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에단 호크가 어릴 적 물줄기로 만들던 무지개 사이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았다는 얘기를 하던 바로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얘기하는 줄리 델피를 보는데,
갑자기 5년 전의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가 생각났다.
내가 그를 쫓아가 혹시라도 연인이 되는데 성공했다면, 아마 나도 그의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잡으려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당신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왼쪽 귀의 뒤쪽에 있던 작은 점을 발견했고,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
고작 왼쪽 귀에 있던 점 하나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점을 보는 순간 내가 방금 어떤 경계를 지나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3.
그토록 사랑에 빠지고 다시 기어 나오는 생활을 반복해 왔건만
난 아직까지도 내가 정확히 어느 순간에 '분명하게' 사랑이라는 정체 속으로 빠지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기억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나에게는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마치 술을 한창 마시다가 갑자기 필름이 끊기는 것과 훨씬 더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전날 내가 정확히 몇 잔째의 술잔을 비우면서 정신줄을 놓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듯,
어쩌다보니 어떤 사람이 유독 신경이 쓰이고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나는 호감의 국경을 넘어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어쨌든 사랑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잘 된 일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가끔은,
사랑하고 있다고 신이 나서 손을 잡고 함께 달리다가도 몇 번 씩 뒤돌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출발선이 어디인지. 우리는 함께 얼만큼 달려왔는지.

#4.
  그래서. 고맙습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당신은 자신의 왼쪽 귀 뒤에 점이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른 채 살고 있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