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냉정한 분위기였다.

바늘같은 냉랭함을 오랜만에 느껴보니 온 몸이 쭈뼛,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한편 상대방의 호의와 환대에만 익숙하다는 건 그만큼 내가 공적 관계를 갖지 않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나이가 50이 가까워 오는데도 말이다.

 

현재는 없는데 미래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느낌이라, 솔직히 처참한 기분이었다.

이게 내 현실일 수도 있겠구나 싶으니 씁쓸하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고 와주셨으니, 지금도, 이후도 가 주시겠지. 사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내 힘으로만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리고..냉정한 현실은 현실대로, 앞으로 이런 세상이 더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받아들여야겠지. 그 냉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도. 지금 내 위치에서는 가능성 말고 지금 있는 것을 증명하여 보여줘야 한다는 것.

'살맛난다' 카테고리, 오랜만이다.

12시30분부터 저녁 6시. 중간 10분 쉬는 시간 몇 번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합창 연습을 했다. 마지막 곡을 노래할 때쯤엔 머리가 띵하고 손이 좀 떨리기도 할 정도. 몰입의 시간들이 스르륵 지나갔고, 즐거웠고, 신났고, 감동적이었고, 노래하는 목소리들을 들었고, 어여쁜 모습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처음 본 선후배도 노래와 함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듯 허물이 없어지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노래, 합창의 힘 덕분이겠지. 

평균 나이 중년인 사람들이, 토요일 11시부터 모여서 준비를 하고(그 전에도 모이기 위한 수고들이 있었다.), 김밥과 커피를 먹고, 계속 지휘자를 바라보며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우리 속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저녁을 같이 하고,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공연 다음날처럼 계속 노래가 흥얼거려지고, 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맴맴 돌았던 자잘한 고민거리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별 거 아닌 듯 가벼워진다. 이게 도파민 분비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사소한 생활의 문제들, 해야할 일들이 '그냥 하면 돼.'로 변화되고 있었다.

하루도 채 못 채운 시간으로 사람의 정신상태와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가 달라지는 걸 보면, 인간은 얼마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동물인지. 나란 사람이 얼마나 그런 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는 듯하다.

남편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우리 딸에게도 이런, 좋아하고 몰입하는 일에 흠뻑 빠져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릴 때 경험하는 이런 시간들은 정말 귀하겠구나, 다시 느꼈다. 재이를 좋은 곳으로 가서 참여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일상에 매몰된다',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 이런 은유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와 남편에겐 '연구-강의-재이 돌보기' 주로 이 세 가지 유형의 일상이 너무 오랜 시간 반복되어 왔다. 재이도 비슷하겠지. 재이도 학교- 가끔의 수영/피아노 학원-영어 공부. 이 세 가지가 너무 반복되어 왔다. 우리 모두에겐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한번 누렸으니, 남편과 재이에게도 기회를 줄 차례. 그들에게도 전환점이 필요한 여름이다.

그에게 무력함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내 상태라고 규정짓자 울음이 복받쳤다.

울음이 그치지를 않아서 결국 밖으로 나가서 대성통곡을 한 후 창피해져서 앞쪽으로 그냥 걸었다.

걷다 보니 힘도 들고...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아보니 새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걷는 소리는 무섭다. 두꺼운 파카가 서걱서걱 부딪히는 소리가 크레센도처럼 내게 다가올수록 크게 들리는데 순간 긴장하게 된다. 예전에 학생 중에서 눈이 안 보이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이렇게 긴장하고 살았겠구나 싶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가고 다시 지금 쓰고 있는 논문 생각이 났다. 오늘 할 일이 떠올랐다. 걷기와 대성통곡의 효과인가보다. 쑥쓰러움과 민망함을 안고 평화로워 보이는 공원 속 사람들을 통과해서 다시 그의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힘이 든 건 힘이 든거지... 아니 척 할 필요는 없겠지. 어쩌면 그닥 힘들지 않은 상황인데 힘들다고 말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 요즘 유행어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들 하던데, 맞는 말이지만 '헝그리 정신'과 유사한 2024년 버전인 듯하여 그닥 맘에 다가오진 않는다.

막막함과 나이듦의 무게는 생각보다 크다. 

2024.3.10.일요일, 아이의 영어학원 끝나기를 기다리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