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5.
가지들만 남아 그 속이 훤히 다 보이는 겨울 산.
겨울산은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이 솔직해서 좋다.
양수리 집에 가면서 매 계절의 산과 들판을 볼 때, 예전에는 생각지 못하던 많은 것들을 아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게 된다.
어제 퇴근 길, 104.5. 교육방송 라디오.
영어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영어 강사 특유의 발랄하다 못해 촐랑대는, '썬 킴'이라고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바쁘게 들려온다.
과천에서 왔다는 엄마와 11살의 아들이 오늘의 초대 손님이다.
까부는 영어 강사 둘의 목소리 뒤에서 쑥스러워서인지 주눅이 들어서이지 기어들어가는 아들의 목소리와 그런 오픈스튜디오에는 올 것 같지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엄마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풉-사회를 보는 저 영어 강사, 오늘 애 좀 쓰겠다 싶다.
애써 분위기를 업시키려는 썬 킴이라고 하는 영어 강사는, 인사치례로 이것저것 부자를 인터뷰한다.
"어머니, 그럼 아들의 영어 교육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그냥...뭐..방치해요." 푸핫. 잠시 정적. "(푸하하하~) 네, 그러시군요. 그럼, 우리 어머님의 영어 실력 좀 볼까요오옷? What is your new year's resolution?"-"레에...졸루션?"-"your future plan~?"-"아...네. 영어 회화 실력을 기르는 거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한국어로 또박또박 차분하게 대답하는 여자. "하하하하~~ 네, 그러시군요." 어색한 웃음의 강사.
채널을 돌리려다가 푸하핫, 출연진의 덤덤함도 신기했고 영어 강사가 말리는 것도 웃겨서 계속 들었다.
"엄마와 아들이 오셨는데, 아빠는요?"-"아, 전 싱글맘이에요."라고 바로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는 출연자. 순간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려는 찰라, EBS의 노련한 영어 강사는 화제를 전환한다.
허어-
그 여자의 목소리나, 아이를 EBS 방송국까지 데리고 견학을 온 것으로 보아 그 여자는 매우 당당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아마도.....
그렇지만 그동안 그 여자에게는 영어 강사처럼 '무심코 한 질문들'에 답을 해야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았을까?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주위 분위기를 일순간 당황하게 만든 경험이나 본인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지도 모르고, 또 오지랍이 넓은 사람의 경우 캐물을 수도 있는 이러 상황들에 얼마나 많이 부딪혔을까.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1) 사실대로 말한다.
2) 거짓말을 한다
3) 화제 전환 등으로 질문에 대하여 회피한다.
아마도 그 여자는 영어 강사가 진지하게 던진 질문이 아닌 줄 알고 있으니, 2)나 3)으로 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1)로 답을 했을까? 원래 1)을 선호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마도 아이가 있으니 더더욱, 자신들의 상황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 한 가지라는 점을 얘기해 주고,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스무살 무렵부터 평범치 않았던 이력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타인은 '그냥' 의례적으로 물은 것들에 대해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경우.
그때마다 줄기차게 1)을 선호했었는데, 그게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방법이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방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솔직함이 필요한 것인지조차 헷갈린다.
살아온 해가 늘어갈수록, 쌓여가는 이야기가 많을수록솔직하다는 내용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그 대상은 어떤 식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 편하자고 '솔직함'을 택했었고,
어릴 때에는 그게 당당함으로,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청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어느 누가 상대방의 내밀한 이야기, 부담스러운 이야기, 불편한 이야기, 복잡한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누가 상대방의 짐을 같이 지고 가고 싶어하겠는가.
상대방이 들었을 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범주에서 솔직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닌지.
'예의'와 '친절함', '다정함', '가벼움'으로 무장한 어른의 사회에서는 솔직함의 내용 범위는 훨씬 좁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저 가식이 아닐 때, 사람들은 저 사람은 솔직해라고 평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상대방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아니고,
상대방의 인간됨됨이 뭐 이런 걸 얘기할 문제도 아니다.
인간의 속성이 즐거운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건 매우 보편적인 것이니까.
...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