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고 싶다면 매일, 조금이라도 글을 쓰세요."
오늘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실은 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매일 한 장이라도 글을 쓰자. 엄마가 매일 조금씩 화폭에 색을 칠해나가서 한 달쯤이 되면 그림을 완성하듯이.
논문을 쓰는 게 어렵고, 편하지가 않다. 심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논문을 잘 못 쓰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고,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부족해서인가 되묻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여기까지 왔지만, 내 공부가 내게 맞는 옷이 아니라서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논문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글을 분석해 보기도 했다. 그 사람의 문체, 전개 방식, 주제에 대한 깊이 등.
전통적인 국어학 논문의 전개 방식, 패턴과 내 글쓰기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가부터 눈치채기 시작했다. 언제였더라? 아마도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그 방식은 고리타분했고, 내 숨통을 조여오는, 그런 글쓰기였다. 문학처럼 장황하지는 않지만 뭔가 치밀해 보이려고 애쓰는 쓰기 방식. 사실 그리 치밀한 논리 전개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심각하게 논리적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도 왜 그렇게들 쓰고, 써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문을 보면서 감동했던 것, 아주 재밌다고 생각했던 몇몇 선생님의 글이 있었는데, 결국 난 그 선생님들의 글에서 영감을 얻엇고, 영향을 받아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딱 그 두 분 빼고는 너무 어렵거나 너무 쉬워서 다 재미없는 글뿐이었다.
글쓰기를 이렇게 어려워하는 내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업 시간에는 꼭 글쓰기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양, 아이들에게 생각을 확장하는 법, 아이디어를 내는 법, 문단을 쓰는 법, 문단과 문단을 잇는 법 등에 대해 그럴 듯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연구실로 돌아오는 내내 드라마 한 편을 무사히 찍고 나왔다는 생각과 함께 허탈감이 들곤 한다.
모교에서 하고 있는 전공 강의는, 내가 그 하위 분야에 대해 그렇게 정통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 분야에 대해 충분히 지식을 제공해 주고, 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지 사실 자신감이 없다.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내가 박사 학위를 받은 분야에 대한 것뿐이다. 선망의 대상인 이성범 선생님의 책과 굉장히 명석하고 치밀하게 쓰인 논문을 읽으면서, 이런 대가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반면 같은 과목을 내게 배우는 학생들은 그 깊이 면에서 얼마나 부족한가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 같은 젊은, 여전히 초보 수준의 선생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내가 지겨워하는 글쓰기 수업 정도가 내 수준에서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부정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분명히 나 같은 젊은 선생이 줄 수 있는 게 있겠지.. 뭘까?)
어찌되었든, 내 갈등과는 별개로 그간 내 강의 생활은 얕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순강대응력과 쇼맨십, 그리고 웃는 인상으로 그럭저럭 잘 지속되어 왔다. 학생들은 나를 편안하게 여기고, 100명 중 7~80명쯤은 내게 호감을 보인다. 강의 평가도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강의를 하면서 내 스스로 즐거웠다거나 강의 자체가 기대가 된다거나 한 적은 정말 한 두번 될까?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언제였지......
아주 오래전, 청주던가? 처음으로 15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했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그 학생들은 충청도 지역에 사는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뜻이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의 집단이었다. 학생들의 수준과 나이는 천차만별이었고, 어떤 분은 열정은 넘치지만 기본적인 지식습득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분도 있었다.
한여름의 강의실. 150명의 사람들. 성능이 안 좋은 에어컨과 윙윙 돌아가는 큰 선풍기. 장소는 청주에 있던 병원 강당 아니면 병원 옆의 시청이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기에 컴퓨터에서 지도를 한 6장쯤 뽑아서 운전을 하고 갔다. 서울부터 낯선 지역에 강의를 하기 위해 찾아갔던 서른 살(?)쯤의 어려 보이는 내 모습에 호기심을 보이던 그 분들은 대여섯 시간 동안 꼬박 이뤄진 낯선 국어학 강의를 굉장히 열정적으로 들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규모 인원 앞에서 인원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처음 강의를 했었지만 난 이런 강의는 수백 번은 해 봤다는 식으로 강의를 시작했고, 강의를 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붙고, 다양한 예들을 들기도 하고,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나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심지어 강의 후반부에는 이걸 알면 국어학의 반은 다 안 것이라는 뻥까치 치고 나왔다.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청년- 그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자 기립박수를 쳐 주었고, 난 한바탕의 연극을 잘 마친 배우처럼 유유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서울로 올라오던 길, 힘들지 않았고, 유쾌했고 마음이 뜨끈했다. 예전에 읽었던 '상록수'에서 그 주인공 비스무리한 기분. 도움이 필요한, 배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도 있었던 것 같고, 그곳에서 알게 된 이주여성을 돕는 수많은 아줌마들과 그분들의 열의와 여성으로서의 씩씩함을 봤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반짝거리고 깨끗한 장소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학력이 높거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교수로서의 점잖을 떨며 예의를 차리고 강의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 경험이, 내 강의 경험 중 짜릿했던 기억으로, 보람있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얘길 한다면 아빠는 또 걱정을 하며 내게 경고를 던질지도 모른다. "너는 비주류 쪽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다 똥이다!"식의 표현과 함께.
요즘의 나는 좀 이렇듯 불편하게 살고 있다. 강의도 논문 쓰는 일도 학교에서 사람들을 의식하며 사회적인 인간으로 지내려는 것도, 부모와의 관계도 다 자연스럽지 않다.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기에 모든 대하는 것들과 잘 지내려고 혹은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하며 신경을 쓰다보니 늘상 피곤하고 힘에 부친다.
하늘이와 있을 때가 유일하게 100% 내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
W와 있을 때는? 거의 내 모습 그대로 있는 편이지만, 종종 '소녀 모드'로 바뀌어 있다.(근데 난 소녀가 아니니까, 100% 나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