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8. 화요일. 가을 비

 

멀티를 원하는 세상에서, 짬짬이, 시간을 쪼개 쓰는 것이 안 되는 나 같은 사람은 살기에 좀 벅차다.

무엇을 하려면 '통째로' 시간이 필요하고,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유형이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방해요소가 너무나 많다.

 

교수직만 해도 강의도 하고 연구도 하고 학생들과도 잘 지내고 행정일도 잘 하는 사람을 원하고,

여성으로서도 마음 넓은 부인에, 착한 딸에, 훌륭한 엄마에, 심성 고운 며느리를 세상은 원한다. 아마 원할 것이다.

 

그리 넓은 인간관계를 원하지도 않고,

꿍짝이 잘 맞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늘이랑

저 푸른 초원 위에 작은 집 하나 짓고 살면서

좋은 음악 실컷 듣고, 노래 하고, 피아노도 치면서,

밤에는 별을 보고 달을 보고,

아침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노래도 만들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네.

 

오늘 맞춤법 강의를 세 시간 하고 오면서 든 생각이다.

뭘 그리 정확하게 써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나.

뭘 그리 표준어를 공부하고 외래어 표기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나.

 

훈련에 의해 누가 띄어쓰기를 안 하면 자동으로 손이 가고, 맞춤법에 어긋난 것을 보면 글을 읽다가 탁 하고 걸려버리는 뇌를 가졌으니, 지향하는 바와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의 어마어마한 부조화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2013. 10.2. 수요일 가을 하늘, 가을 날씨.

 

추천서에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하면서 추천서 구조, 내용에 맞게 뭔가를 채워넣고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내가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리도 되고,

부족한 점도 눈에 띄고,

가끔은 이런 살아가는 길에 대한 요약,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또 막상 추천서를 누군가에게 부탁하려니,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인간관계라는 게 꼭 깊이 있지 않아도, 이런 일이 있을 때 '갑자기, 지 필요할 때'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도록,

그 정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관계 유지의 적정거리'가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페북이 필요하고, 문자가 필요하고 카톡이 필요한 걸까. '갑작스레 나타난'의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오늘 의미가 있었던 일은 세 가지였다.

1) PPT 특강을 들은 것. 2시간 동안 정말 알찬 강의였다. 추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해 내는 게 아니라 바로바로 정보들을 익히고 이해하고 실행해 보는 게, 거참, 속이 다 시원했다. 이렇게 얄팍하고 기술적인 정보들도 세상엔 많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이런 걸 하면서 살기도 하는데...... 강의를 하도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난 이해력과 적응력 하나는 정말 높다는 걸 새삼 느꼈다.학습능력이 강화되어 있나보다.

 

2) 추천서에 필요한 자료 정리한 것: 그간 쌓아 놓은 능력과 경력 정리. 양적으로도 모자르고 질적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다. 

 

3) 한겨레에서 김선주 씨의 글을 읽은 것. 그리고 W와 신문보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

  내게 만약 오빠나 언니가 있었더라면, 아마 언니,오빠가 하는 건 다 따라했을 것 같다. 졸려 죽을 지경에, 아무리 바빠도 신문은 꼬박꼬박 보는 W에게 물었다. 왜 그게 그거인 신문을 매일 봐? 신문을 다 읽는 건 아니지? 뭘 주로 봐?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정치, 사회, 경제 면에 이런 게 따로따로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연관되어 있는 게 보이고, 이런 새로운 얘기가 나오면 그게 뭐지?하고 보게 되고, 마음에 드는 관점으로 얘기하는 게 간혹 나오면 읽게 된단다. 요즘 개콘에서 '문재 오빠아~' 하고 쫄랑쫄랑 쫓아다니는 그 여자애처럼, 나도 쫄랑쫄랑 쫓아서 지하철에서 신문을 훑어 보았다.=)  

 

 

2013. 10. 2. 수요일

 

 

글쓰기를 가르치며 도리어 나는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써서 무엇을 생산해내고, 생각을 발표해야 내 존재 가치가 있는 직업군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있지 않다니. 조짐이 안 좋다. 불안하다.

 

학생들에게 글은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고 나서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글을 써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없던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 것이라고. 그것이 글의 힘이라고 번지르르하게 말해왔다.

 

정작 나는 무언가가 완성되었을 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게 아니었는지.

 

글을 쓰지 않다보니 문장은 조악해지고 어휘량도 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이 논리적으로 풀리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다른 원인을 찾아보자면, 만연체이며 비문 투성이인 문장들로 쓰인 논문 같지 않은 논문들을 봐서일지도 모르겠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가 내 머리가 가장 잘 회전할 때다. 생각도 긍정적이고 논리적이다.

이때 글을 써야한다.

 

때마침, JK 선생님이 졸업할 때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나며 부끄러워졌다. 졸업 후 4~5년 동안은 글만 보라는 말씀, 나만 생각하고 나아가라는 말씀, 이 기간이 매우 즐거운 때일 것이며 다시는 오지 못할 때라는 말씀. -지키지 못했다.  난 강의만 죽어라 했고,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다. 선생님과 약속했던 시간이 2년 남았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퍼뜩 차렸으니 다행이고 감사하다.

 

"매일매일 글쓰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글쓰기"

2013. 10.2.~2015. 10.2.까지. 2년 동안 지켜야 할 규범이다.

 

JK 선생님께 안부 편지라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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