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성은 이데올로기 속에도 들어 있고,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에도, 자연에도, 마약이나 음악 등에도 들어 있다.


도교나 불교의 영성은 도를 닦아 결국에는 자신을 '무'의 경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해체시켜 자연과 하나가 되거나 열반에 오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데올로기적 영성은 인간을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해 극단으로 몰아가 파괴시키기도 한다. 기독교적 영성은 '인간화'와 동일 개념이다. 결국 자신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에 목표를 둔다.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나 자신의 모습.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모습.
사람들의 환호성, 호감에 춤을 추고,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결정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저 우주에서 온 내 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라는 존재 자체는 어떠한 모습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는 자신을 똑바로 만나, 어두운 부분까지 다 받아들이는 삶을 지향한다.


영성을 가진 사람은,
1. 오늘,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산다.
2. 나의 어두운 면들을 단절하여 버리거나 하지 않고 '가라지'의 비유(마태복음)처럼 다 인정하며 내 모습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블로그의 메뉴를 '어제'와 '내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현재 내가 얼마나 '비영적 상태'인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요즘 나에게 '현재'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어제를 돌아보며 그리워하고 후회하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기만을 바라며 막막하고 답답하게 살고 있었다. 이러한 습성은 오늘의 일들은 대충 해치워 버리고 마는 결과를 낳았고 항상 현 상태에 대해 불만족했으며 투덜대며 지겨워했다.

또한 나는 나의 어두운 면들을 잘라 버리려 했고, 뭔가 고치려 들었다.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의 내부와 외부는 분열을 일으켜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 되어 방황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나와 함께 계시며,
현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며 멋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낀다면,
나와 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가 삶 속에서 느끼고 있다면,
어찌 하루를 욕구불만 운운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실까?

나는 평생을 걸쳐 '나의 하나님'을 만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뜻을 귀 기울여 듣고 따라야 한다.

믿음의 선배이자 인생의 선배이신 60대의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10대 때 생각했던 하나님과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때 느끼는 하나님의 모습은 계속 달랐다고. 60대에 이르러 느끼는 하나님은 당신의 뜻보다 더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애인이자 친구같은 모습이라고 하신다.

서른 둘.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의 생각과 계획을 움켜 쥐고 하나님을 멀리하진 않았나?
이제는 조용한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다가오시는 '나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가야 한다.

-임영수 목사님(모새골 공동체)의 '영성과 치유'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들은 날. 하나님의 뜻으로, 우연한 기회에 이주연 목사님의 영성 클래스에 참여하게 되었고 ,역시 우연한 기회에 수요 예배에 임영수 목사님의 세미나를 듣게 되었다.

가만히 20분 묵상하기란 생각보다 엄청 어렵다.

아침에 큰맘 먹고 일어나 무릎 꿇고 앉았으나 다시 데구르르 옆으로 눕고.
게다가 들끓는 딴생각들 때문에 묵상은 커녕.....@@

아우-

아침에는 분주한 마음에 못하고,
밤에는 너무 피곤해서 못하고..
핑계도 가지가지.



내 머리 속이 얼마나 산만한 지 여실히 알게 됨.

오늘 밤도 도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북악산에서 본 서울


그놈의 아침잠! 늦장을 부리다 20분 가량 영성 클래스에 늦었다.
10분 먼저 가 있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영성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 북악산으로 간다는 말에 친구는 '가서 울고 하는 것은 아니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영성'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영성'이라는 건 뭐지?

아직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건 내가 관심있는, 현재 내가 갈급하게 원하는 것들로 다가가는 길을 제시해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1. 매일매일이 새롭게, 신비롭게 느껴지는 단계가 영성의 단계라고 한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를 느끼고 깨달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당연히..., 전혀 영적이지 못한 나는 매일 아침이 새롭기는 커녕 죽을 맛이고, 신비롭기는 커녕 하루, 일주일 주기가 반복적으로 뚝딱 지나가며, 밤이면 밤마다 해야 할 것을 못하고 있다는 초조, 불안함으로 잠을 청한다.)

2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냥 후룩 마시는 게 아니라 내가 현재 이렇게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영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젠 유행어가 되어 버린 'Here and now'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그리하여 내가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라는 의미일 듯.

(난 무의식적으로 행동과 말을 던지는 경우가 많고,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래서 맨날 쓸 데 없이 분주하다.)

3. 진정한 내적인 쉼에 이르는 길

(정말 궁금하다. 잠을 잔다거나 운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어 준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잠시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행위들이 '잠시의 쉼'은 준다. 그러나 잠깐의 쉼일 뿐이다.)

4. 진정한 예배, 평안, 자유함에 이르는 길

(역시 정말 궁금하다. 진정한 평안, 자유함. 혹자는 인생이 그렇고 그런 것이라며, 특별한 거 뭐 있냐며 그냥 살라고 하지만 한번 태어난 인생, 이러한 가치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생 뭐 있어.'에 편승해 보려고도 했지만, "simple하게 살겠어."라고 말하면서 그래 나도 괜히 들쑤시지 않겠다라고 해 본 시기도 있었지만, 난 그 시기에 결코 진정으로 행복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게을렀을 뿐이지.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5. 영혼의 자유로움에 이르는 길

(난 끊임없이 '나는 이래요, 사실은 어때요, 그것은 이래요.'라면서 사회에, 다른 이에게 변명하며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스스로 매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더 관심을 갖고 그 판단에 연연해 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유롭길 바랬다니.....
 어느 곳에서든, 누구와 만나서든 여유 있으며, 당당하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6. 존재에서 나오는 평안한 에너지.

(
내 속엔 불안정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사회 생활을 할 때에는 이를 어느 정도 포장하여 안정된 척하고는 있지만..... )

예수님의 영성.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모여들었을까?
존재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평안, 평화로움이 있었기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아, 나도 내 존재에서 그런 평안한 에너지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디의 영성.
1억 5천 인구를 이끌었던 영적인 지도자.
여유, 당당함, 철학을 가지고 있던 사람.
간디는 '행치도 못하면서 지식을 배워서야 되겠냐고' 말했다. '행함'을 논했던 사람.

예수님의 영성과 간디의 영성. 이같은 '영성'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과 묵상과 기도'가 필요하다.

['명상,묵상,기도' 개념의 재정립]
 
'명상'은 '진정한 내적인 쉼'을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명상으로 우리의 존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명상의 개념이 수련의 시작이자 끝이라면, 기독교적 명상의 개념은 마음을 갈아서 기도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써 묵상과 기도를 준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기독교적 명상이란,

1. 자신을 하나님 앞에 멈추어 세우는 길이며(내 목적을 stop 시키고, 십자가 앞에서 나의 욕망을 멈춰 세워야 한다.)

2. 자기를 성찰하는 길이다.; 회개하는 것.
 회개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스스로 찔리는 양심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성찰하는 것. 그래야 회개가 가능하다.

3. 마음을 씻는 길이다.


'묵상'이란,

1. 말씀을 깨닫는 길- 각성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여,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막 4:9)
2. 말씀을 확신케 하는 길- 믿음
'믿음'은 마음의 길.(롬 10:9-10)
입으로 주를 시인하라...
네 마음이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 말씀을 자기화 하는 길-순종


목사님은 일상 생활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도 호흡을 잘 하는 것처럼 생명과 관계된 일들은 하기 쉽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 이유로 영혼의 생명을 위한 일 역시 하기 쉽다고 하셨다.
앞으로 10주, 변화되리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생각을 준비하고, 마음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할 듯하다.

*목사님이 권해 주신 첫번째 실전 훈련; 하루에 세 번, 20분, 명상과 묵상과 기도를 할 것.
(1) 무릎을 꿇고 앉아
(2) 호흡을 들이 마신 후, 다 내뿜고 잠시 숨을 멈춘다.-- 이 때, 생각도 멈출 것이다.
(3)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부른다.
(4) 조용히 묵상하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시간을 하나님께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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