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후배의 생각을 엿보다가, 내가 어느덧 육아 6년차가 되어 가고 있고, 예전보다는 이 세팅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성장해 나가듯이 엄마들도 같이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과 같은 나를 되찾으려는? 움직임들-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하고, 밤을 새서 집중적으로 일을 해내고, 감정이 풍부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은 처음부터 잘못된 설정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집에 사람이 늘었고, 그 사람은 나의 아이인데, 어떻게 이전의 나와 똑같은, 나를 찾는답시고, 나를 주장하려 했단 말인가.

어리석었다.

나도 아이처럼 성장하고 진화해 나가야 한다.

이 아이가 하루하루, 매월, 매년 모습이 다르게, 사랑스럽고 똑똑함을 장착하며 커나가듯이,

엄마인 나도 매월,매년의 모습이 이 아이와 보조를 맞춰 엄마다운 안정감과 따뜻함을 장착해 나가고, 그러면서 나의 일을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지속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진화'를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너와 내가,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는 것.

왜 이제야 알았을까.

이전 모습 그대로 버티는 것이 다가 아니고,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래도 잘못된 설정이다.엄마는 진화 중. 네가 자라나는 것처럼 나도..., 진행해 나가볼게.

 

2017. 7.24. 새벽 0:46 어제, 그제 주말 내내 비 오고 흐림

 

뉴스에서는 인천 지역은 성인 가슴께까지 비가 차고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어제 오늘 아이를 보며 갇혀 있다고 입이 퉁퉁 부어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에어컨까지 펑펑 틀어대면서 집이 답답하다고 투덜거렸다.

(아마도 어제 남편이 모처럼 주말 약속이 있어서 외출을 하고, 내가 재이를 온 종일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도저히 전업 주부를 하면서 아이만 키울 수는 없는 인간인 것 같다.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스럽지만, 내가 행복하지는 않다.)

 

 

이번 주는 우석이 떠나기 전 주.

재이와 나, 우석 세 사람의 첫 여름 피서가 잡혀 있고,

그는 떠나기 전 부모님 댁에 1박 2일로 다녀 오기로 했고,

대학 동창들과 저녁 모임도 잡혀 있고,

건강 검진도 하려 한다.

떠나기 전 그는 매우 분주하고,

나 역시 마음이 안 잡힌 채 싱숭생숭하다.

내 기분이 잘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

 

 

그는 오늘 짐을 조금 쌌다. 책들, 노트들을 큰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

나는 도와주기는커녕 보기가 싫어서 혼자 거실에 있다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늦은 밤, 만두를 구워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내 연구에서 통계 돌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까지 그에게 떠넘겼다.

괜한 심술이다.

 

 

 

그가 가고 난 삶이 어떨지 상상이 안 되는데, 시간은 으례 그렇듯 잘 흘러간다.

그의 말대로, 감상에 젖어 무엇하겠나.

그런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게 좋겠다.

서로에게, 또 우리 딸에게도 도움될 게 없으니.

 

나의 우울 유전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려고 자꾸 고개를 버쩍버쩍 드는데..

우울할 수는 있지만, 우울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우울해 하는 것.

늪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고쳐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또 난 이제 재이 엄마니까. 또 우석의 아내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관계망에서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니까.

 

 

우리에게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고,

그도 나도 정체되어 있지 않을 기회의 시간이고,

우리 딸에게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좋을 것이라 생각하려고 한다.

기도해야지.

나에겐... 기도라는 큰 무기가 있다.

기도하자. 잊지 말고.

 

 

그가 가고 나면,

정신 차리고,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니 빠릿빠릿하게 잘 살아봐야지.

"말만 앞서지 말고!"(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오랜만에 산마루에 예배를 보러 갔다. 

우석은 안 가고 나와 해님이 둘이 갔는데, 차 안에서 해님이에게 얘기를 해 줬다.

7개월이나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러 가는 거라고.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러 가는 거라고.



오늘 예배는 외부에서 오신 목사님의 군더더기 없이 짧은 설교였는데, 종교적인 표현으로 은혜를 받았다.

회개가 밀려왔다.


하나님이 종교적 지도자로 멈춰 있고,

필요할 때 가끔씩 꺼내보는 도구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두려움이 있어서 아닌가.

하나님을 왕으로 삼을 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칠까봐? 아니면 찾아올 변화가 싫어서?

아니면 자기가 살아온 방식, 자기 자신을 놓기 싫어서?


예수님을 내 변방에 두지 말고,(- 변방에서 어물쩡거리며 사는 삶, 별 것 없더라.)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자.

왕 되신 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