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일요일이다.

아마 우석과 내가 이렇게 일요일을 한가롭게 보내는 것도 이제 몇 주 안 남았겠지.

점심을 나란히 앉아서 먹으며, 어제 못본 '디어마이프렌즈'를 재방송으로 봤다.

그는 목이 메어 밥이 잘 안 넘어간다, 나는 훌쩍거리면서 휴지를 달라고 하며 코를 푸는 등, 사는 게 뭔가 싶다는 둥...하면서

대낮에 드라마를 봤다.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일일까.

지속해서, 계속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웃었다가 울었다가,

지루해하다가 흥분했다가,

그러면서 나이를 먹어가고,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또 지속해서 살아가고, 웃고, 울고, 지루해하고, 흥분도 가끔하고...반복.

언제가 끝인지 모른 채, 뭐가 완결되는 것인지, 완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삶'이란 건 참으로 신기하다.

'삶'이라는 것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그 시간과 공간, 환경이 인간을 이끌고 가는 건 아닐지.

인간의 의지라는 것만으로는 이 정체 모호한 '삶'이라는 걸 지속해서 이끌고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해님이, - 36주 5일.

말 그대로 '만삭'이 되면서 몸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이상하게도 발뒤꿈치부터 지릿지릿 쥐가 나는 증세가 반복되고,

손발은 꽤 부어서 반지가 들어가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뒤뚱뒤뚱.

임신 전보다 11kg이 늘었으니 허리나 다리도 버티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그동안 너무 게을리 했다 싶어서 아침에 한 시간 조금 넘게 요가와 호흡 연습을 했다.

 

어제부터 여름 날씨다. 낮 기온이 26~27도나 된다.

해님이가 초여름 아기라는 사실이 체감되고 있다.

지난 주에 이어서 해님이 침구를 빨아서 널어 놓았다.

우석도 빨래를 널면서 귀엽다고 흐뭇하게 웃는다.

함께 사는 사람이 참 귀엽다.

우리는 지금도 중년 나이이긴 하지만, 더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게 서로를 귀여워하면서 지낼 것 같다.

 

출산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분주하다.

해님이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아마도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지 않다보니 내가 더 이러는 게 아닐지.

내 생활은 16주, 2월에 짜 놓은 수업계획서대로 딱 들어맞게 돌아가고, 그 이후엔 성적처리를 하고, 두 달 정도는 방학.

이게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삶이었는데....

아기가 생기면 돌발상황이 많아지고, 쪽으로 시간을 내어서 짬짬이 일을 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다들 말하는데..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아직 수업이 두세 번 남아 있고, 시험 문제를 미리 내놓고, 조교에게 감독을 부탁해 놔야 한다.

5월 말까지 연구제안서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손 봐서 H에게 넘겨야 마음이 편할 것 같고.

 

또..출산 당일 준비도, 호흡이나 운동, 정신력 강화? 같은...준비도 해 놔야 하고.

그동안 요가도 했고 출산 교실도 다니긴 했는데,

연습을 그리 잘 해 놓은 편은 아니라 마음이 급해진다.

 

해님이 목욕용품, 수유 관련된 용품, 기저귀 등은 산후조리원 들어가서

해님이 상황과 내 상황을 보면서 결정해야 될 일이니 일단 머릿속에서 삭제.

아, 흑백 모빌?/ 해님이 모빌은 하나 사놔야겠다.

 

그리고 마지막 숙제.

30일까지 논문 투고...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하나 마무리 짓고 출산하면 마음이 편할텐데..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

 

오늘 밤엔 기도하고 자야지.

 

오늘 우석과 함께 병원에 갔다.

사람이 무척 많아서 30분 정도를 기다렸고(임산부들은 연휴가 있어도 어디를 안 가나보다.),

초음파로 해님이 머리 모양을 봤고, 심장 박동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양수의 양도 적당하다는 말을 듣고 왔다. 

내 체구가 작은 편이고, 배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리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서 양수의 양이 부족하면 어쩌나 약간 걱정되기도 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진료 시간은 다 합쳐서 1분 정도?

해님이가 아무 문제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행이지만,(해님이는 약 2.4kg 정도라고 한다.// 반면 난 임신 전보다 10kg이 늘었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진료 시간은 너무 짧아서 약간 허탈? 허무한 채 우석과 나왔다.

 

 

다다음 주부터는 내진을 하고, 분만에 대해 얘기하게 될 거라고 한다.

여건이 된다면 자연 분만을 할 생각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왕절개를 해야겠지.

출산이라는 게 순리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싶다.

하나님이 여성을 창조하실 때, 다 알아서 장치를 해놨겠지 싶고.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골반 벌리기나 요가, 호흡법을 좀 더 적극적으로 연습해 놓아야겠다.

'노산'에 해당하긴 하지만,

그만큼 정신력이라든지 마인드컨트롤 같은 능력은 나이에 비례하는 거니까...

침착하게만 하면 출산도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병원 방문은 좀 허무했지만,

남산 공원에 가서 점심을 먹고, 공원을 산책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초록으로 가득한 5월을 봤고, 기분 좋은 햇빛과 바람을 쐬며 걸었다.

공기에 실려 있는 꽃 향기도 맡고.

점심을 먹으면서, 우석과 부모님도 한번 모시고 오면 좋을 것 같고, 나중에 우리 해님이와도 종종 오자는 얘기를 했다.

 

 

특히 공부와 일로 지쳐 있는 우석에게 병원에 매번 같이 가자고 하는 게 마음 한 편으로는 좀 미안한 감이 있었는데(머리로는 전혀 미안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석도 이 장소를 마음에 들어 했고, 기분 전환도 된 것 같아서 좋았다.

그가 행복하고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시간과 일에 쫓기면서도 잘 내색하지 않고 나와 해님이, 양가 부모님,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우석에게 고맙다.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린 결정적인 계기는,

이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내가 옆에 있으면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땐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나 모르겠다.

좀 더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하는 건 분명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우석과 해님)을 위해,

좀 더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세요.'-평생의 기도 제목이다.

 

 

 

+종합비타민(임신 후기용)과 칼슘제를 샀음. 68000원. 진료비 약 9만 원.

 - 쏠쏠히, 지속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걸 보며,

   돈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뭐 이런 생각도 잠시 했다.

 

 

<33주 1일> 임신 9개월이 시작됨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주수가 바뀔 때마다 확실히 몸에 변화가 온다. 새로운 증상도 생긴다.

33주차.

몸이 더 무거워져서인지, 쉽게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진다.

 

어제는 저녁 준비를 하는데, 4~50분가량 서 있으니 허리가 너무 아프고,

식사 후에는 뒷정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오늘도 하루종일 내내 몸이 휘저어져서, 안 되겠다 싶어서 요가를 다녀왔는데

운동 조금 했다고 또 잠이 쏟아진다.

오늘 하루 종일 쪽잠을 두 번이나 잤다.

 

 

4월 30일까지 마감인 논문은 또 글렀네.

논문 하나 못 쓰고 4월이 지나가 버리다니.

뭘 하면서 지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작년에 비하면, 훨씬 수업이 적은데도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나가고 있다.

 

 

해님이가 태어나면,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시간이 더 많아질텐데,

그 시간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이 얼굴을 보면 분명 행복하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건 분명하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제공해 주는 행복감만으로는 살아가면서 한 구석 공허함을 느끼는 부류라서....

아이나 남편이 주는 행복감으로는 살아가는 의미/재미를 채울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해님이가 태어난 후, 논문을 쓰는 건 정말 무리겠지만, 아주 아주 작게라도 뭘 해야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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