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없는 날이다.

오전:  테니스
-- 오전부터 몸을 써야 한다니, 영 마뜩치 않게 시작했으나 움직이고 공을 천장으로 쏘기 시작하니 기분도 같이 가벼워졌다.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었군요!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 얘기도 하고 웃으면서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이 테니스의 장점이다.

아기 엄마들끼리 혹은 지하철에서 할머니들끼리 허물없이 말을 빨리 트는 것처럼, 테니스 코트장에서는 누구하고나 자유롭게 말을 건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의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다. 상대방이 나이가 많든 적든 성별이 어떻게 되든, 학교에서의 직위가 어떻게 되든 오로지 '테니스 초/중/고급'으로만 사람을 보게 되서 그런 건가?

왜 나는 그동안 말 없이 혼자 하는 '요가'나 '수영' 같은 운동을 했던 걸까. 강스매싱을 날리며 코트를 뛰어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 음화하하하하하~

11:30 학교 식당에서 아점
 육개장과 깍두기. 해물동그랑땡. 3000원이란 가격 치고는 괜찮으나, 국물이 너무 멀개서....흠. 학교 밥만 맛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텐데.TT 정말 맛없다. 게다가 교직원 식당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라 좀 불편하다. 편해져야 할 텐데...... 거짓으로 살고 있는게냐, 아니면 뭔가 잘 보이고 싶은게냐? 도대체 왜 불편하단 말이냐.

12:00 휴게실에서 커피
- 공짜 커피. 식당 옆 휴게실. 그럭저럭 커피 맛이 괜찮다. 바쁜 시간에는 노인장 분위기가 나는데, 오늘은 시간이 좀 일러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커피도 마시고 티백도 하나 가지고 연구실로 왔다.

12:30 연구실
---쓰러져 잤다. 아침부터 몸을 움직였던 게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쇼파가 하나 있다면 금상첨화. 너무한 생각인가.

1:30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왔다. 테니스 책 한 권도 빌렸다. 흐흐.

2:00 논문 마무리
  --- 정신 차리고, 어무니가 싸 주신 딸기를 먹은 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은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 당분간 이런 주제를 건드리고 싶진 않다.

처음 보는 조교가 권 언니에게 뭘 갖다 주러 연구실에 들렀다. 후드 티셔츠를 입고 분홍색 지압 슬리퍼를 신고(이게 좀 깬다. 그치만 피로 회복에 짱이다!) 책상에 양반 다리로 앉아 있는 나의 행색을 보더니 좀 놀란 눈치였다. 쩝.

5:50
 --이메일로 논문을 보내기 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부끄럽다. 글쓰기 선생이 이렇게 글을 못 써서야.

상반기에는 어디 내놓아도 안 부끄러운 논문 한 편을 써야겠다. 여튼 이런 주제는 다시 안 건드리고 싶다. 

6:00 학교 출발
--- S 언니가 가르쳐 준 길로 가보려다가 영 이상한 쪽으로 가서 고생만 했다. 본능대로 가면 된다고 했던 언니 말을 믿어봤건만......
길과 건물을 번호로 기억하는 나는 이런 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성향 재확인.

7:00 S와 M을 만남. 생파. 생일을 맞은 M을 좀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안 됐다. 마음만으로 다 된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증거를 대시오.

따뜻하고 순한 S와 속을 잘 안 보여주나 우리보다 어른 사회인이자 그래서 든든한 M. 15여 년이 되었으나 우린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10:30 집 도착
위대한 탄생을 보고 있는 엄마. 그 옆에서 이야기 중인 아빠. 내 가방 속에서 테니스 공을 찾아 꺼내 든 하늘이. '우리집' 하면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오늘 하루 참 길었군.





K 선생님의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테니스도 안 치고 오늘까지 수정하려고 했던 논문도 던져 놓고 시청으로 달려 갔다.

다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반길 때, 그 기운은 금세 느껴진다.
순간 세상이 환해지고, 마음이 훈훈해지니까.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즐겁게 느껴지니까.

정이 많고 따뜻한 분.(쫀쫀한 생김새 뒤에 그런 마음이 숨어 있다.)
솔직함과 허세 없는 진실함.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분.
매우 성실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분.


만나자마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쏟아내고 선생님과 정말 실컷 웃고 얘기했다.
이 나이에도 선생님에게 이렇게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니! =) 아까의 광경을 지금 떠올려도 흐뭇하고 웃음이 난다.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촉촉 내리는 봄비와 습기 덕분에 기분 좋게 풍겨 오는 덕수궁 돌담길 너머의 풀 냄새.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과 길을 걸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간도 공간도 모두 초월하게 되더군.

내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고, 염려해 주고, 함께 기뻐하고 안타까워 해 주는 좋은 스승이 계시니, 나는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가. 그것도 세 분이나 된다! 세상에!




-
한 가지 마음이 쓰이는 건, K 선생님이 예전부터 마음 깊숙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허무함, 슬픔 등의 정서다. 선생님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기본적으로 순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분이시니 훨씬 더 행복하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야지......


내 주변에서 하나님은 모르지만 마음과 영혼이 맑고, 사랑도 많고, 겸손하고, 측은지심이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텃밭 자체가 깨끗하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런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인데도 삶에 대한 허무함이나 슬픔 등을 기본적인 정서로 갖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학교 게시판이었다.

'Xian'에 대한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병마총이 있는 시안.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Still Life. 지난주 EBS에서 해 주길래 쭈그리고 앉아 봤다.

지난번에 누워서 본 것처럼 지루하기 그지 없는 영화인 건 분명한데,

두 번째 보니 이것저것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 된다는 게 희망으로 생각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답답한 현실로 다가온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거대한 큰 바퀴는 나도 모르게 굴러 가고,

작은 바퀴 속에 사는 나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굴러 가고,

그 두 바퀴들의 방향이 일치한다면 운이 좋은 것이고,

방향이 불일치한다면 그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정말 영화 제목 심하게 잘 지었다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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