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그러니까 2011년 3월.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취직을 했다.연구실이 생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며 방글방글 웃고 다녔다. 학교의 마스코트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났다. 오늘 회의를 마치고 오며 심란했다.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심란함. 짜증. 화?(이건 아니고..), 불만스러움.......

 

 

여러 귀찮은 행정 관련된 일들이 생각보다 있었지만, 그 양이 많아서 치이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이런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문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학교의 태도에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나를 반성해보기도 했지만 더이상 이런 짓은 안 하기로 했다. 그들의 행동거지의 원인이 뭐든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니까. 찌질하고 비겁하다. 그러면서 배웠다고 또 말들은 길고, 번지르르하게 해댄다. 학교? 학교 역시 발전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혀 시스템화 되어 있지 못하고, 모교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키우지 않는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프라이드를 전혀 심어주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싼 등록금이 어떻게 프라이드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입이 댓발 나와서는 투덜거리는 내 모습 속에서, 좀 웃기는 걸 발견했다. 왜 이렇게 투덜거리지? 뭐가 심란하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나의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아닌데, 이렇게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낸다거나 내 모교도 아닌데 발전가능성 운운하면서 어쩌고저쩌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는?

 

심리 상태를 깊숙이 파보니, 나의 찌질한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 평가할 때 '찌질하다'고 여기는 집단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게 못견디게 싫은 거였다. 하아- 나 역시 쥐뿔도 없으면서.......

 

이런 웃기는 자존심(자존감은 아니다.)이 어쩌면 여태껏 나를 지탱해 주는 기운이었을 수도 있지만, 바람직하거나 건강한 에너지는 아니다. 이런 에너지로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친 것 같다.  

 

앞으로의 삶을 끌고 갈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기치가 필요한 때라는 신호가 아닐지. 기도로 구해야 한다. 왜, 늘 나는 돌고돌아서 진을 다 빼고 난 뒤에야 하나님께 기도하려 드는지. 먼저 기도하고 간구할 수는 없는지.

 

 

 

 


우연찮게, 오늘 계속 같은 주제로, 관련된 일들이 생겼다.

P 선생님의 프랑스인 남편에 대한 얘기-

오늘 40번째 생일은 맞은 남편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을 세 가지만 얘기해 보라고 했단다. 그러자, 1. 따스한 햇빛, 2. 그 아래서 마시는 맛있는 커피, 3. 이런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라고 했단다.

그 선생님은 이 대답이 프랑스인다운 답변이라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듣고, 뭐랄까...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난 뭘 바라보며 살고 있나, 무엇 때문에 요즘 이렇게 머릿속이 시끄러운가 싶었다.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난 뭐라고 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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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 수요영성클래스에서도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또 하게 됐다.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율법학자는 예수를 만나자,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마가복음 12:28). 이처럼 자잘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난 후, 궁극적으로 묻게 되는 것은 전체에 대한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인생에서의 궁극적 질문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된다.

P선생님의 프랑스인 남편이 또 떠올랐다. 그분은 저 질문에 대해 굉장히 간단하고 담백하게 얘기했겠지.

목사님께서 내게 저 질문을 하셨을 때, 말하기가 뭐해서, 또 목사님도 내게 진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닌 듯하여 가만히 있었지만 사실 떠오른 대답이 있었다.

'사랑'-사랑을 충분히 주고 받으면서 사는 것.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결핍되어 있구나
그래서 내가 때때로 삶이 허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구나 싶었는데,
집에 오면서 생각해 보니, 사랑을 주고 받는 대상이 꼭 가족이나 연인, 자식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대상을 넓힐 수 있는 것인데.

오늘 묵상한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가복음 12:30-31)."라고 하신다.


목사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simple life'를 살 수 있게 된다고.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니,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살아가는 것이 단순하지 않고 마냥 복잡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중요한 게 많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종류만 많은 분식집에서 어느 하나 제대로 내 오는 음식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고,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딱 부러지게 알고 가자.

이왕 태어난 것, 병든 인생으로 시들시들 살다가 가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나.
꽃을 피우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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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 떠오른 2012년의 키워드는 '정면돌파'다.
삶을 관통하여 성장하는 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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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고 가는 삶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 것이다.
살면서 '역경'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올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계기를 통해 더 성숙해지를 바라시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세계관은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의 역경/고난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기독교는 알아서 도를 닦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일은 아니지만.

완고한 어른, 고집불통인 어른으로 늙어가는 까닭은,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이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유연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어른으로 나이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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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요영성클래스에서 성경을 묵상하며,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매력을 느꼈다. 정말 그는 시대의 개혁가였고, 용감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 옛날, 새로운 가족 개념을 제시하다니.....

예수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시고는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 34-35)

예수의 가족 개념에 대한 선포.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고 행하는 사람이 형제자매요, 어머니라는 선포는 가깝게는 나를 포함하여,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 못하여 뭔가 불완전함을 호소하는 싱글들에게, 나중에 늙어서 피붙이가 없으면 어쩌나 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에게, 또 고아에게, 미혼모들에게, 독거노인들에게...또는 가족은 있으나 외로운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며, 오래 참고, 불쌍한 이를 불쌍히 여길 줄 알고.....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 전해주고 실천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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