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2021.6.15. 기말시험, 과제 받기. 그 후로 시험 채점과 과제 채점을 찔끔찔끔하면서 미뤄 오다가 결국 27일 새벽에 끝냈다. 새벽 5시, 동이 터 온다. 둥그런 달도 보이고.

이번 학기는 2년 반 동안의 미국 생활 후 우여곡절 끝에 맡게 된 첫 수업에,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공 수업을 맡은 터라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던 수업이었다. Zoom으로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된 첫 번째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혼동과 변동의 시기에서 커리어를 재개해 보려던 때.

열심히 수업했지만, 학생들의 성취도는 그닥이었다. 학기 초에 의욕이 앞서서 너무 달리다보니 중간고사 이후에는 진이 빠지기도 했었다. 자잘한 과제나 퀴즈를 내려면 성적 처리까지 고려하여 바로바로 하거나 평가와 피드백을 할 수 없다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만 있었지 한 편도 생산해내지 못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 멀리 송도를 왔다갔다하면서 무엇을 했는지도 불명확하다. 새로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게 되기는 하였지만, 거기서 끝이었고, 말도 안 되는(?) 한국어 번역거리를 교열한 게 대부분의 일이었다.

1) 수업

-평가를 고려하여 과제, 시험, 퀴즈 등을 수행. 점수가 들어가는 사항은 바로바로 점수를 매기고, 엑셀에 기입.

- 비대면 수업에서 퀴즈나 생각해보기는 동영상 강의 후 확인용으로 좋음. 다음 시간 온라인 수업에서 답을 맞추거나 생각을 나눌 수 있음. 확인이 중요하고, 피드백을 줘야 함.

-학부의 경우, 학생들의 발표가 훌륭함. 잘 활용. 비대면 수업에서도 유익.

- 대학원의 경우, 유학생들이 많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기말 논문 작성은 '과정'을 볼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함. 기말에는 자기 논문을 발표하고 서로 논평할 수 있도록 함.

-8주 이전에 이론을 배우고, 시험을 보는 것도 공부를 시키기 위한 방법임. 

-논문 읽기의 경우, 모두가 논평을 하게 하거나, 간단한 퀴즈로 확인하여 성적에 반영함.

2) 송도

비생산적임. 지금 시기에 도움이 안 됨.  

3) 논문 쓰기: 월간 혹은 격월로 내야 함.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으로+앞으로 해야 할 것으로.

2. J

새로운 한국 유치원에 잘 적응했다. 한 학기 동안 사회생활을 경험했고, 단순히 자기가 놀자고 할 때, 다른 걸 하고 놀겠다는 친구의 말을 'OO는 나를 싫어해.'로 해석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거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다. 아이가 무언가를 잘 하거나 못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누구를 닮은 걸까.'로 이어지는데,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아이는 독립된 개체로 봐야 한다. 누군가의 연결성이 아니라. 

4월 한 달간은 일교차가 심한 날씨 때문에 비염 때문에 엄청 고생을 하더니, 5월부터 날씨가 더워지니 습진과 알러지 같은 피부 가려움증이 심해지고 있다. 아이도 고생, 나도 고생. 피부과에 데리고 가봐야 하나 싶다.

3. 남편

자기 일에 진심이고 열심히인 사람. 운도 따라준 것도 있지만 실력이 있기도 하겠지. 어쨌든 코로나라는 이 어려운 시기에 유학을 마치고 온 첫 해, 바로 직장을 구했다. 한국에 와서 적응한답시고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린다. 한 학기 학계에 발을 디딘 이 사람의 삶의 만족도는 매우 높아보인다. 건강을 좀 더 잘 챙겨야하지 않을지. 내가 챙겨줘야 하는 건가???

4. 다시 나

나와는 매우 다른 공부 방식, 일 처리 방식을 지닌 남편을 따라 하는 것은 아니다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멀티태스킹을 해야 할 때, 이 사람의 방식은 적합한 면이 많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해온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난 아이를 더 돌보고, 집안을 더 돌보는 입장이니(생각한다. 이 사람은 부인할지 몰라도, 여하튼 난 그렇다.) 이 사람처럼은 안 된다.

시간을 잘 조직화하는 일이 중요하며, 절대적으로 정돈되어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 두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부딪힘이 생기더라도, 내 몫을 챙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가족들에게 잘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당신이 아니며, 지금 시기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점에 대하여.

2021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6편.
월간 윤종신처럼, 논문을 써야 한다. 이게 올해의 지상과제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20%를 더 해서 쓸 것.

+ 미국에서 찐 살이 빠지질 않는다. 아마 줌으로 수업하고, 집에만 앉아 있다보니 그런 것도 같고. 뚱뚱해지는 외향의 문제도 있지만 더 자주, 빨리 피곤해지는 게 큰 문제다. 올해 말까지 미국 가기 전으로 되돌려 놔야하는데, 그러자면 -7kg을 감량해야 한다. 매달 1kg씩 빼야 한다는 소리인데...가능한가???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감이 없다. 식이요법과 운동. 두 가지겠지? 

++하고 나서 힘이 너무 빠지는 일은 안 하는 게 맞다.

[2021. 3. 29. 월요일 새벽 4:52] 다시 블로그를 시작했다. 카테고리는 분류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2021년을 쭉 써나가야지.

미국에서, 아니 그 이전에도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살아온 듯한데, 기록이 없으니 시간을 겅중겅중 뛰어넘어 온 것 같아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익숙한 페이스북에 쓰자니 거긴 사적 홍보인지 공적 홍보인지가 애매해져 버린 공간이라 글을 보태기 싫었고, 좀 더 조용한 자리를 찾아 여기로 왔다.

한동안 글을 안 썼더니만, 이젠 사진이 없으면 글도 안 올라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2021년. 마흔넷이다.(만 나이로) 

여기에 앞으로 어떤 걸 써서 채워나갈지 모르겠는데, 매일매일을 적어둬야 할 것 같은, 그래야 살고 있다는 걸 입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이 새벽에 들었다.

[3.26. 금요일]

지난 금요일 재이 유치원에서 확진자 선생님 한 명, 추가로 그 반 아이 한 명이 확진자로 판명이 되었다. 아침 유치원 버스를 태워 보내자마자 집에 와서 우유 한 잔을 먹고 있을 때 울려온 전화였다. 부랴부랴 아이를 다시 마중 나갔고, 아침 시간에 집에서 책을 볼 수 있어서 좋다는 재이와 하루를 잘 보냈다. 익숙해서 놀랐다. 그리고 예전보다 지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는 것에도 놀랐다. 아이는 아이의 할 일을, 나는 내 할 일을 하려면 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남편은 연구실에 갔다.

[3.27. 토요일]

아이 한 명이 확진자로 분류되었다는 추가 공지가 들어오면서, 그 아이가 재이와 종일반에서는 같은 반인 아이라 접촉 가능 대상자가 되어 2주간 격리 명령을 받았다. 양성,음성 여부와 관련없이. 4월 7일까지 격리. 보호자 1인도 아이를 돌봐야 하기에 나도 자가격리다. 남편이나 다른 가족은 외부로 나가 있어야 한다는데, 남편도 함께 격리하기로 했다.

12월 15일, 한국에 와서 격리, 이번이 두 번째 자가격리다. 약간 어이없고 실소가 나기는 한데, 우린 익숙하다. 미국에서 지난 2020년 갈고 닦은 실력이다. 셋이 뭉쳐서 같이 지내기. 남편이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그 최악의 시기에도 우리는 셋이 집 안에서 같이 지내왔으니, 내공이 쌓일 만큼 쌓였으리라. 우리는 오늘도 깨알같이 웃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남편 덕. 우리 재이도 아빠의 이런 면을 닮았음 했는데, 실실 농담도 하는 걸 보면 이미 닮고 있다. 우리 셋의 포지션닝이 대략 정해지고 있다. 남편과 재이는 유머 담당, 나는 웃기 담당. 

[3/28. 일요일]

보슬비가 예쁘게 내리는 봄날. 우리집 앞 공원에는 개나리, 벚꽃이 보인다. 아침을 먹고, 보건소에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의 깊은 빡침과 분노가 일었다. 검사 부스 안에서 들리지도 않는 윙윙거리는 말로 손짓을 하며 안내 아닌 안내를 하던 그 사람은 처음부터 저거 뭐냐 싶더니만, 결국 검사할 때도 개그지 같았다. 조그만 아이를 발판 위에 올라오라고 한 후, 지 팔이 잘 닿지도 않는 상태에서 코를 쑤신 것이다. 우리가 귀국을 해서 양평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양평에서는 검사하는 사람이 그 추운 날씨에도, 방역복을 갖춰 입고 부스에서 나와, 아이를 부모가 안고 앉으라고 하더니, 조심스레 검사를 했었다. 근데 이 인간은 자판기에서 나오는 100원짜리 커피처럼, 그 자리에 애를 서게 하고 꽉 잡으라고 하더니, 컵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버튼을 누르면 무조건 내려오는 커피처럼 자기는 꼼짝않고 서서 팔만 왔다갔다 하며 코에 봉을 쑤셔대는 거다. 아이는 당연히 울고, 순식간에 이뤄진, 그리고 순식간에 무방비로 당하고만 나는 분해서 "아이를 검사하는 데 나와서 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인간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기서 해도 똑같은 거라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진심으로 빡쳤다. 그년의 자판기 같은 태도에. 

재이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욕을 하며 싸웠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치만 걸어나오다가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저 썅년이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썅.년...그 사람은 아침부터 나에게 썅년이란 말을 들었으니, 되었다. 그치만 대다수에게 그딴 식으로, 커피 자판기처럼 기계적 코 쑤심을 하고 거기 있을테니, 그리고 양평의 그 추운 데서도 살뜰하게 사람들을 살피던 동종 업계의 사람들을 깎아내리는데 일조하고 있을테니, 나는 내일 정의의 이름으로 보건소와 구청 게시판에 민원을 넣을 생각이다.

[3/29. 월요일 새벽]

5시30분이 되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났었는데.

우리의 두 번째 쿼런틴이 시작되고. 설마 아니겠지 하고 있지만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기를 기도하고. 우리 세 식구가 또 약 10일 간의 격리 생활을 잘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고보니 교회에 나간 지 너무 오래되었다. 나의 신앙은 어디로. 누구에게로. 무엇에게로. 다른 사람들은 미국에 다녀오면 신앙이 더 깊어지던데, 텍사스의 보수성, 휴스턴의 대형 교회 컨셉이 나와는 안 맞았던 모양이다. 

 

*여기, 이곳엔 가능한 한 그날의 주요한 일들만 기록해 두고 싶은데 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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