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올해처럼 매우 더운 날, 빵빵한 에어콘 쐬며, 팝콘 먹어가며 볼 수 있는 오락영화다.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배우들 몇몇의 매력적인 몸과 얼굴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껄렁한 세계를 몸과 얼굴 되는 배우들 써서 폼 잡으며 그려낸다.

볼거리가 많아서 2시간이 지루하지는 않다. 

알멩이는 없다. 빈껍데기뿐인데 사람들은 좋다고 박수친다.

돼지 살이 아니라 돼지껍데기를 먹으러 간 거였고, 껍데기를 맛있게 먹었으니 만족이라고 말하는 거겠지. 타당한 논리다.

 

같은 감독의 영화였던 <타짜>도 그랬다.

거기에는 조승우라는 배우와 김혜수의 몸이 있었다.

내용,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때도 사람들은 '재밌어!!!'라고 외치며 열광했다.

'재밌다'라는 세 음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타짜>는 약속이 펑크나서 대학로에 나간 김에 시간이 마침 맞아서 보았던 영화였고,

난 중간에 보다가 그냥 나오고 싶었다.

 

이제부터 이 감독의 영화는 돈 내고는, 시간을 일부러 들여서는, 안 보겠다.(감독 이름이 뭔지 기억해 놔야겠음.) 물론 TV에서 보여주면 볼 거다. 밥 먹으면서, 옆에 사람과 떠들면서 보기엔 매우 적합하다.

 

불안함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심 가는 몇 가지가 있긴 하지만, 상당히 모호하다.

 

얕디 얕은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책을 들었다.

짧은 생의 기록들-기형도 산문집.

 

이 말들은 너무 낡았다.

누군가 살다간 집처럼."

좋다. 간결하고 예리하다.

 

 

 

"이 같은 시적 계통을 밟아 형성된 80년대 후반 최근의 문명비판 시인들로는 <<지상의 인간>>, <<반시대적 고찰>>의 박남철, <<춤꾼 이야기>>,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등의 이윤택, <<반성>>, <<차에 실려 가는 차>> 등의 김영승, <<우리 사는 세상>> 등의 윤성근,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등의 장정일, <<독자 구함>> 등의 박중식 등이 꼽힌다.

  이들은 황지우, 이성복, 최승자, 마광수 등 80년대 전반 시인들의 다양한 우상파괴, 형태파괴의 시정신을 계승하되, '타락한 사회'를 적극적으로 폭로, 야유하기 위해 '타락한 언어'를 방법적으로 동원함으로써 비어, 속어, 은어, 파괴, 냉소주의 등의 극단적 면모를 과격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상상력을 통한 현실의 재구성'이라는 기존 시문법을 파괴하고 경험을 '날 것' 그대로 동원함으로써 '언어테러리즘'이라는 용어까지 낳고 있다."(88. 5. 4. 기사)

  요약과 논평의 한 예. 선행연구 쓰기의 표본이라고 할까.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대해 논평할 것.

  문장력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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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머리가 복잡했다.

한 학기가 끝나 방학을 한 게 분명한데, 이렇게 껄쩍찌근, 뜨뜨미지근할 수가 없다.

 

시간상으론 분명 한 텀이 끝났는데, 내 생활은 아직 무엇 하나 끝난 게 없다.

끝나야 할 시점, 마무리를 지을 시점에서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니 정신을 못 차리고, 어벙한 상태로 지내게 되는 것도 같고.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다. 왜 생각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절로 마음이 쓰이는 것들이다.  부모님, 양수리집, 서울집, 나의 위치, 학생들, 독어, 인사, 성적처리, 기말시험채점, 연애, 결혼, 운동, 다이어트, 근육량, 예배, 기도, 하늘이.......

 

기형도 시인의 말대로 나는 흔해 빠진 말들로 무언가를 적고 있고,

십여 년 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의 깊이로, 그리 논할 것도 없는 말들을 끄적인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를 않는다.

 

대충 이렇게 적고 나면 해결이 되곤 했는데, 뭐지? 보일 듯 말듯.

 

 

 

입춘, 춘분, 경칩 등등이 지난 지 한참인데도 오늘 눈이 잠시 내렸다. 2012년 4월 3일이다.

어제 오늘 연일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깼는데 계속 꿈이었고, 현실인 줄 알았는데 꿈이었던 거라 일어났는데 무진장 피곤했다. 게다가 오늘 꾼 꿈은 예전에도 한번 꿨던, 거의 비슷한 꿈이다. 아..... 

이래저래 망설이다, 시덥지 않은 뉴스를 보다가 예전부터 보고 싶던 <<만추>>를 보았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좋았다.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도 그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아니 나의 이야기였다. 

탕웨이의 영화.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한겹한겹 층층이 이런 깊이가 느껴졌을까.

또 감독이 누군지 궁금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던데......(물론 뒤에서 버스를 같이 타고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음), 우리나라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기분 좋을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카메라 앵글이 세련됐더라. 

 

 

비주류들의 이야기.

비주류 중에는 아마도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스스로도 굉장히 피곤한 부류들도 있고(비주류1), 자신만의 행복의 척도에 의해 살아가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비주류2), 어쨌든 이들의 삶은 외부에서 볼 때는 고단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뭔가 '보통'(그 실체가 정확히 뭔지 불분명하면서도 뻔하기도 함.)과 다르다는 이유로. 

안타깝게도 난 비주류1에 해당한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마냥 살고 있는, 고되기 짝이 없는 비주류 1.

'애가 혼자인 것 같지 않다.' , '아들이 있어야 든든할텐데. 그래도 저런 딸이 있으니 열아들 부럽지 않겠어요.'부터 시작됐지? 아마. 그 후로 '애가 조그마한데 아주 당차요.', '손이 조그만데도 피아노를 칠 때 힘이 있구나.', '넌 재수한 것 같지 않구나. 애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이대 나온 것 같지 않아요. 몰랐어요.', 심지어 얼마 전엔 '참..쟤는 어쩜 저리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들은 다들 칭찬이랍시고 하는 얘기들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모두 '부정적'이라는 걸 증명한다.

앞으론 또 어떤 편견에 맞서야 할까.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구나.' 이 얘기가 마지막으로 남은 걸까. 이렇게 되려고 또 애쓰면서 살아야 하나. 

지친다. 왜 난 꼭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수많은 그들처럼, 그냥 살 수는 없었을까. 모두가 수긍하고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할 만한 배경에서, 누구나 그래 보이는 것처럼. 언제까지 이런 일들은 생길 것이며, 난 언제까지 세상의 편견에 맞서 '그렇지않아요.'라는 걸 증명해가며 바득바득 애쓰며 살아야 하는 걸까.

탕웨이의 말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아니, 뭐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아직도 유치하게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로운 영혼인 척 하면서 실은 남의 눈치 왕창 보며 살아가는 부자유스러운 영혼은 아닌지. 성경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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