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술교육 참관일이었다. 아이가 공부하는 학교에 처음으로 가는 날.  원래 나는 이날에 학회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 달 전쯤, 하필 이 날이 아이의 수업 참관일인 것을 알고는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하면서 학회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고 사죄를 하며, 이런 말을 무지 많이 하며, 아이의 첫 번째 수업 참관에 간 거였다.

5교시, 12시40분부터 1시 20분이라는 낯선 시간 대에 맞춰 남편과 함께 아이의 학교로 갔다. 보통 약속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가는 남편과 나는 이 날만큼은 늦지 않게, 여유있게 집을 떠났다. 난 안 하던 화장도 했고,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다. 미리 입고 갈 원피스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걸어놓기도 했다. 어릴 때, 우리 엄마가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들어올 때 참 예뻐서(다른 엄마들과 달리 엄마는 예쁜 옷을 입고 있었고, 아주 날씬했고... 다른 아줌마들과는 좀 달랐다.)  친구들에게 으쓱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난 우리 엄마 재질은 못되지만, 그래도 재이에게 다른 의미로라도 엄마가 온 게 으쓱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외모에 별 신경을 안 쓰는 우석도 이날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었다. 아마도 그는 '젊어 보이는 아빠'가 목표였던 것 같다.ㅎㅎㅎ

학교에 도착해서 교실을 찾아가는데, 재이와 함께 셔틀버스를 타는 S를 복도에서 만났다. 남의 아이도 어찌나 반갑던지! 똘똘이에 야무진 S는 우리에게 예술교육 참관하러 오셨냐면서, 바이올린2반인 재이의 교실로 우리를 직접 안내해주었다. 학교 설명을 해 주며 자그만치 4층까지 앞장 서서 걸어가는 2학년 아이. 귀여워서 웃음이 저절로 났다.  

교실에 들어서는 엄마를 발견한 재이는 크게 '엄마다!'라고 부르더니 좀 상기된 표정이다. 재이가 아이들 중 1번으로 앞에 나와서 연주를 했는데, 재이 말로는 가장 잘하는 순으로 선생님이 제비를 뽑아서 쥐어줬다고....ㅎㅎㅎ 어쩐지 앞의 세 명은 꽤나 연주를 잘하고 뒤로 갈수록 좀 서툴더라니......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열심히 비디오를 찍었고, 사진을 찍었다. 연주가 끝난 후엔 브라보를 외치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연주회를 한껏 즐겼다. 아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연주들을 꽤 잘했고, 저는 까불이에요라고 얼굴에 써 있는 남자 아이도 연주하는 특정한 순간에는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어린이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나는 확실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더라면 내 모든 걸 다 갈아넣어서 아이들에게 잘해줬을텐데.... 아쉽다.)

재이 순서가 끝나고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선생님을 관찰했다. 소심한 아이, 말 한마디 없는 아이가 눈에 띄었고,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한없이 까부는 밝은 영혼이 보였고, 역시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그런데 그 엄마는 한없이 어두웠는데...이 매칭은 어떻게 된 걸까??) 아이와 엄마. 이 두 짝은 대개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재이와 우리도 그러겠거니 하면서 살펴봤는데,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 잘 알 수는 없었다. 재이의 모습을 통해 나와 남편의 모습을 유추해 볼 뿐이었다.ㅎㅎㅎ

재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활발했고 적극적이었다. 수업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말도 잘했고, 다른 친구에게 뭐라뭐라고 코멘트도 해주고, 나름 조교처럼 선생님을 도와주는 말들도 했다. 남편과 나는 재이가 모범생이리라 예상은 했지만 내심 너무 재미없고 딱딱한 모범생일까봐 걱정하기도 했었는데, 학교에 있는 재이를 보며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게다가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 재이는 착착착 자리 정리를 하더니 우리와 상관없이 다음 수업을 위해 쿨하게 다른 교실로 바삐 떠나갔다. 우와..다 컸네! 쿨하지 못한 나는 재이야~~ 어디로 가는데에~~ 엄마랑 아빠는 그럼 먼저 갈게~~ 이따 만나자~~ 뭐 이런 말들을 재이에게 했던 것 같다.

40분간의 짧은 수업 시간 후 남겨진 남편과 나. 우리는 서로 훗-하고 웃었던 것 같다. 우리 딸이 잘 크고, 잘 지내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학교를 나와 우리 둘은 아이의 교복 집에 들려 아이 옷을 하나 주문하고, 점심 때가 훌쩍 지나 배가 고픈 나머지 거기서 가장 가까운 식당에 쑥 들어가서 갈비탕과 냉면을 한그릇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맛없었다.-.-)

초1. 첫 번째 참관기 끝. (집에 도착해서 30분쯤 후에 학교 셔틀이 도착. 헉......... 쉬지도 못했음.@@)

이제 약 한 달 뒤면 아이의 여름방학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나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사립초에 보내면 학원 신경 안 써도 되고, 학교에서 아이 수준에 맞게 잘 키워질거라 너무 믿었던 까닭이다. 

4주간의 여름방학 동안 2주는 Summer 스쿨에 나가긴 하지만, 점심은 안 먹고 온다고 한다. 아..세상에마상에. 9시부터 시작, 12시 10분 하교, 셔틀을 타고 오면 아마도 12시 30분쯤 되겠지. 집에 오자마자 점심을 먹어야 하고, 나는 그걸 준비해야 하는 거다. 매일매일 4주 동안 주말 모드(=아이와 함께 계속 노느라 지치는 모드)로 지내게 생겼다는 생각에, 일평생 처음으로 나의  '소.중.한, 꿀.맛.같.은.' 여름 방학 중 한 달이 날아간다는 사실에, 나는 거의 멘붕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이 어린 아이는 나만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후 1시부터 잘 때까지... 뭔가를 기대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세 시간 넘게 온갖 군데 전화를 돌려가며 여름 방학 스케줄을 짜봤다. 태권도, 음악줄넘기, 수영-소그룹/단체 강습,  구립센터 프로그램들, 인라인, 키움센터까지...... 그런데 헉, 사립학교 스케줄과 맞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방학 특강들은 모두 공립 아이들에 맞춰 있기에 오전에 시작하는 거였다. 이런 걸 하려면 학교 스케줄은 할 수가 없다.

대혼동의 시간. 머리를 쥐어 뜯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고, 이 땅의 모든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우란 말인가 분노했다 하면서 그 작은 카페에 앉아 정신적으로 요란법석을 떨었다. 내 연구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의 의미 있는 여름 방학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둘 다 살아야 해..뭐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 모드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 새벽에 결국 정신을 차리고야 말았다.(다행이다. 돌아와서)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뭘 위해 이러는 건가 싶었다. 정신을 차리는 데 필요한 특효약은 역시 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게 대혼동과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구만. 1. 책을 읽는다- 2. 글로 적는다.-3. 머리로 정리한다.)

1/3 정도 읽다가 말았던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지은 재미나고 귀여운 책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거기에 뭔가 있을 것 같아서... 4월의 일지에서,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말을 발견했다. 

"우리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요? 아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무서워하는 것, 흥미를 느끼는 것. 두려워하는 것, 기대하고 바라는 것. 아이에 대한 이해는 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저녁 아이와 함께 작은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의 마음을 한번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초등샘 Z, <<오늘 학교 어땠어?>>, p.104.)

재이가 방학 동안 기대하는 건 뭘까, 내가 만약 8세, 초1의 여름방학으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을까. 무엇을 하는 것이 만7세의 한여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될까. 여름방학의 한 달 동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뭘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일 재이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그 마음속을 잘 들여다 봐야지.

 

새벽 3시30분. 잘까, 아니면 논문을 쓸까, 아니면 계속 이 책을 읽을까. 새벽에 잠을 안 자고 5시까지 밤을 새우고 지낸 지 3일째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재이 학교 갈 준비를 한 후, 8시 5분에 남편이 재이를 데리고 나가면 식탁을 정리한 후 8시15분부터 10시30분에서 11시까지 자고 일어난다. 이 패턴이 아주 건강한 방식은 아닌데, 모레까지만 유지해 볼까 생각 중이다.

 

 

Dear. J

  너의 선택이겠지만 엄마이자 여자로서 난 너에게 꼭 결혼을 하라고 권하고 싶진 않아. 결혼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은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게 분명하고 그간 살아왔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만들어. 뭉클할 만큼 좋은 것도 있고, 욕 나올 만큼 짜증나는 것. 둘 다 있지.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야,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둥 하는 말을 쉽게 내뱉는데, 그런 말은 믿지 마. 그냥 하는 말이거든. 특히 자기의 삶에 대해 그닥 책임감이 없고, 생각이 없거나 가벼운 사람들은 그런 떠다니는 말들을 자기 생각인 양 말하는 걸 좋아한단다.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하거나 아이를 안 낳거나 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루트를 따라 가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지. 예를 들어 자기 자신과 가족에 함몰되는 것 대신,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에,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 자연에, 환경에 필요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엄마가 너무나 사랑하는 음악과 미술 같은 좀 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에 눈을 돌려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거거든. 뭐든 자신의 선택이야. 네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란다. 그리고 나서 결혼-아이 낳기 등을 선택하면 될일이지. 많은 사람들은 '나'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정해 놓은 대로, 결혼과 출산을 해버리는 것 같아.  

 

엄마가 살고 있는 지금, 2020년은 여전히, 할머니가 살던 시대처럼, 여전히 여자들에게는 힘든 세상이야. 결혼까지는 여자의 주관이 뚜렷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면, 자기가 살아오던 패턴을 거의 유지하면서, 큰 변화없이 살 수 있거든.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면서는 그러기가 정말 힘들어. 일단 아이의 주 양육자는 엄마가 되어 버리거든. 네가 살 때에는 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몸 속에 품고, 낳고, 젖을 먹이고..이 기간이 있다보니, 아빠보다는 엄마가 아이와 더 밀착하게 돼. 그러다보면, 자기가 하던 일은 자기 패턴대로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단다. 정말 쉽지 않아..... 

난 네가 simple하게, 맘 편히 살려면 혼자 살거나(물론 네가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아니면 마음이 잘 맞는 친구(그게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다.)와 공동 생활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결혼을 하더라도 요리를 할 줄 알고, 집을 가꿀 줄 아는 '공동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해. 정말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이만 총총. 새벽 2시 21분이야. 너와 함께 내일 즐겁게 놀려면 자야하거든.

엄마는 여러 가지가 꼬이고 엄마 커리어는 정말 난관에 봉착했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널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너의 삶이 엄마의 삶보다 좀 더 빛났으면 좋겠고, 네 이름처럼 맑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너를 위해 기도해. 얼른 크렴.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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