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올해처럼 매우 더운 날, 빵빵한 에어콘 쐬며, 팝콘 먹어가며 볼 수 있는 오락영화다.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배우들 몇몇의 매력적인 몸과 얼굴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껄렁한 세계를 몸과 얼굴 되는 배우들 써서 폼 잡으며 그려낸다.

볼거리가 많아서 2시간이 지루하지는 않다. 

알멩이는 없다. 빈껍데기뿐인데 사람들은 좋다고 박수친다.

돼지 살이 아니라 돼지껍데기를 먹으러 간 거였고, 껍데기를 맛있게 먹었으니 만족이라고 말하는 거겠지. 타당한 논리다.

 

같은 감독의 영화였던 <타짜>도 그랬다.

거기에는 조승우라는 배우와 김혜수의 몸이 있었다.

내용,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때도 사람들은 '재밌어!!!'라고 외치며 열광했다.

'재밌다'라는 세 음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타짜>는 약속이 펑크나서 대학로에 나간 김에 시간이 마침 맞아서 보았던 영화였고,

난 중간에 보다가 그냥 나오고 싶었다.

 

이제부터 이 감독의 영화는 돈 내고는, 시간을 일부러 들여서는, 안 보겠다.(감독 이름이 뭔지 기억해 놔야겠음.) 물론 TV에서 보여주면 볼 거다. 밥 먹으면서, 옆에 사람과 떠들면서 보기엔 매우 적합하다.

 

입춘, 춘분, 경칩 등등이 지난 지 한참인데도 오늘 눈이 잠시 내렸다. 2012년 4월 3일이다.

어제 오늘 연일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깼는데 계속 꿈이었고, 현실인 줄 알았는데 꿈이었던 거라 일어났는데 무진장 피곤했다. 게다가 오늘 꾼 꿈은 예전에도 한번 꿨던, 거의 비슷한 꿈이다. 아..... 

이래저래 망설이다, 시덥지 않은 뉴스를 보다가 예전부터 보고 싶던 <<만추>>를 보았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좋았다.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도 그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아니 나의 이야기였다. 

탕웨이의 영화.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한겹한겹 층층이 이런 깊이가 느껴졌을까.

또 감독이 누군지 궁금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던데......(물론 뒤에서 버스를 같이 타고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음), 우리나라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기분 좋을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카메라 앵글이 세련됐더라. 

 

 

비주류들의 이야기.

비주류 중에는 아마도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스스로도 굉장히 피곤한 부류들도 있고(비주류1), 자신만의 행복의 척도에 의해 살아가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비주류2), 어쨌든 이들의 삶은 외부에서 볼 때는 고단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뭔가 '보통'(그 실체가 정확히 뭔지 불분명하면서도 뻔하기도 함.)과 다르다는 이유로. 

안타깝게도 난 비주류1에 해당한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마냥 살고 있는, 고되기 짝이 없는 비주류 1.

'애가 혼자인 것 같지 않다.' , '아들이 있어야 든든할텐데. 그래도 저런 딸이 있으니 열아들 부럽지 않겠어요.'부터 시작됐지? 아마. 그 후로 '애가 조그마한데 아주 당차요.', '손이 조그만데도 피아노를 칠 때 힘이 있구나.', '넌 재수한 것 같지 않구나. 애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이대 나온 것 같지 않아요. 몰랐어요.', 심지어 얼마 전엔 '참..쟤는 어쩜 저리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들은 다들 칭찬이랍시고 하는 얘기들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모두 '부정적'이라는 걸 증명한다.

앞으론 또 어떤 편견에 맞서야 할까.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구나.' 이 얘기가 마지막으로 남은 걸까. 이렇게 되려고 또 애쓰면서 살아야 하나. 

지친다. 왜 난 꼭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수많은 그들처럼, 그냥 살 수는 없었을까. 모두가 수긍하고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할 만한 배경에서, 누구나 그래 보이는 것처럼. 언제까지 이런 일들은 생길 것이며, 난 언제까지 세상의 편견에 맞서 '그렇지않아요.'라는 걸 증명해가며 바득바득 애쓰며 살아야 하는 걸까.

탕웨이의 말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아니, 뭐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아직도 유치하게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로운 영혼인 척 하면서 실은 남의 눈치 왕창 보며 살아가는 부자유스러운 영혼은 아닌지. 성경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던데......

 

 

 

 


앞날이 불안할 때는 영화를 규칙적으로, 매일 보는 습관이 있다. 재수할 때 들인 습관인데, 한 시간 반 남짓만 들이면(특히 집에서 비디오로 보면) 적은 돈으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긍정적 기운도 받을 수 있고, 또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도 쉬워서 택했던 방법이다.

3일 동안 세 편의 영화를 봤으니, 불안정한가보다.


<1>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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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의 경계, 뭘까?

아이나 어른이나 그 층위에서 살아갈 때에는, 나름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나간다. 어려움의 차이는 양의 차이일 뿐 결코 질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니들은 속 편하겠다, 매일매일 무슨 걱정이 있겠니 라는 둥의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나 아이나 갈등 상황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건 같은데, 재밌는 것은 갈등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들의 대처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갈등 상황을 뚫고 나가기보다는 '술', '친구', '취미활동'  등의 외부 활동으로 이 상황을 회피해 나간다. 어찌할 수 없다면서. 어찌보면 아이들보다 회피할 구석이 더 많은 게 어른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삶이 찌질하기도 하다. 반면 아이들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뛰어든다. 뛰어든 다음? 그 뒷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꿈, 기적

영화 속에 나오는 아이들만큼 바라는 것,
기적이 일어난다면 꼭 이뤄지길 바라는 게 한 가지씩만 있다면
그 사람의 나이가 마흔이든 쉰이든 그는 늙은 어른이 아닐 것이다.
애들의 눈동자는 어른보다 검고 더 크다는 엄마 말대로, 그 어른의 눈동자도 검고 클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인 나이로 아이와 어른을 경계지을 수 없다는 게, 이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꿈, 기적을 품고 있는 자와 놓아버린 자가 '젊은이'와 '늙은이'의 경계선일 것이다.

나이 들어서까지 계속 꿈 꾸며 행동해 나갈 수 있고,
이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영화의 2/3 지점에선, 약간의 '애들 로드무비' 식이 되어 좀 늘어지는 감이 있는데, 그래도 재밌었다. <카모메식당>이나 이 영화는 DVD로 갖고 있으면서 가끔씩 꺼내보면 좋겠다. 어디서 파나? 올 연말쯤 또 한번 보고 싶은 영화.

**@광화문 미로스페이스.
   낮 시간에 영화 보고, 따뜻해진 길을 걸으며 자유롭게 얘기하고 웃고, 낮술 한잔까지.
   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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