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님이와 함께 다닌 지, 이제 딱 6개월을 채웠다.

5.5kg 정도 몸무게가 늘었고, 매일 인생 최대 몸무게를 갱신 중이다.

배도 꽤 나와서 누구나 임산부인 줄 알아볼 정도다.

스커트나 바지는 안 맞고, H라인 원피스 역시 배가 가득차 편하지가 않다. 

개강을 하면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해님이는 안에서 자기가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를 자주 보낸다. 신통방통한 것!

그제는 왼쪽 자궁 쪽이 새벽부터 다음 날 저녁 나절까지 묵직하게 아파왔다.

그런데도 우석과 CGV 5000원 할인이라는 말에 쿵푸팬더3를 보고 왔는데, 집에 오니 자궁 쪽이 좀 더 묵직하고 상당히 피곤했다.

좀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다음 날이 되니 통증이 없어졌고, 해님이도 별 탈 없으니 감사했다.

 

 

오늘 병원에 가서 임신당뇨 검사를 했고, 정상 판정을 받았다.

빈혈도 없고, 해님이의 심장도 팡팡 잘 뛰고 있고, 해님이를 보호하고 있는 양수량도 정상이라고 하니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몇 주 전부터 당뇨 검사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좋아하는 과일 섭취도 줄이고 빵도 줄이고, 이왕이면 집밥을 먹고 등등 했는데,

이러다 보니,

뭐가 이렇게 조심해야 되는 게 많은가 싶고,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못 한다는 생각에 답답해지기도 했었다.

그치만 오늘 병원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엄마와 우석이 함께 갔었는데, 좋은 소식만 전할 수 있어서 오랜만에 좀 신이 났었다.

 

게다가 초음파 사진에서 본 해님이의 윤곽은,

내가 봐도, 엄마가 봐도, 남편이 봐도... 날 닮은 게 아닌가!

난 이왕이면 남편과 닮은 아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아가가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니까 마구 웃음이 났다. 쿠하하하하하~

나랑 비슷하게 생긴 애가 내 몸 속에서 나오면, 아- 정말 이거야말로 우주의 신비겠지.

 

병원 앞에 임산부 옷가게에서 바지 하나, 스커트 하나를 사긴 했는데, 영 예쁘진 않다.

다른 데 같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옷가게다.

어젠 미장원 가서 머리도 좀 자르고...(이것 역시 염색도 좀 하고 파마도 좀 해야 되는데, 다 못하니 영 예쁘기는커녕 별로다.)

해님이와 함께 개강을 준비하고 있다.

 

 

일단, 이번달-29일. 얼마 안 남았네...-까지 지원서 완성,

3월 10일경까지 논문 완성해서 넘기는 일 하나가 남아 있다.

해님이는 (벌써부터!) 착한 게, 내가 책상에 앉아 있을 땐 얌전히 있다가 좀 쉬려고 눕거나 TV를 보러 소파에 앉거나 할 때엔 신이 나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또 잠들기 전, 우석하고 얘기를 하면 꼭 자기도 움직인다!! 

해님, 우석과 함께 잘 해 나가야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기를 가지니 모두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저녁 식사 때 때때로 기도를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자꾸 오늘 하루를 무사히, 잘, 따뜻하게 지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는 자꾸 눈물이 난다.

나중에 해님이가 태어났을 때 약한 엄마 모습은 별로인데 좀 걱정이다.

(어릴 적 내 기억속의 엄마는 외향은 하늘하늘하고 예뻤지만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 어떤 엄마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

 

 

2011. 2. 9. 저녁에 다시 추워짐.


시립대에서 만난 분들은 담백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국립국어원 분위기도 이랬고, 그때 내 바로 위의 연구원 선생님도 '정말 좋은 사람'으로 이름난 분이셨는데, 이번 역시 비슷하다.

하나님은 항상 까다롭지 않은 사람들을 동료로 붙여 주시고, 게다가 인간적으로 배울점이 많은, 덕 있는 사람들을 내 주변에 보내주신다. 정말 큰 복이다. 분명 내가 예민하고 근본적으로 유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다 계산하고 하신 일이다.

게다가 내 생애 처음으로 남성 비율이 월등히 높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 거의 감격 수준이다. 고학력 여성 집단의 깐깐함과 철두철미함에서 벗어났다는 게 참으로 기쁘다!
아하하하하하!

잘 지내보자!

알랭드보통이 한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좌표가 불안정하기에 '불안'을 느끼는 것일지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러했다.
조급할 것 없는데도, 이제 시작인데도 불만이었고,
강의가 여기저기서 넘쳐흘렀는데도, 그것도 싫었다.
나라는 사람의 좌표는 떠돌거나 아예 표시도 안 되어 있거나 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과거에 정체되어 있는,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곳에 틀어 박혀 있다는 생각. 여튼 그러했다.

어제 받은, 합격을 알리는 전화는 내가 그동안 '물리적인 좌표'를 얼마나 필요로 한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간의 과정을 생각해 보니, 어딘가 자리가 나서 가게 된다는 건 사람들 말대로 운과 노력의 합작품이라는 말이 맞다는 것과 또 성실히 살다보면 안 되는 건 없겠구나 싶다. 그리고 모든 경험이 쌓여 선을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때마침 국어학 전공자를 원했고, 때마침 난 학위 소지자였고, 나이도 이젠 너무 어리지도 늙지도 않았다.

2008년 새벽에 일어나 엄마(! 아...여지없이 어무니 등장해 주신다.TT)가 상봉터미널에 데려다주면, 거기서 7시에 학교버스를 타고 가서 정말 빡 세게 강의해야 했던 내 생애 첫 번째 강의는,
그리고 하필(or 운 좋게도) 한의학과와 OOO과라는 같은 학교 내에서도 최상위와 최하위 수준의 애들을 가르쳤던 경험은 내가 다양한 수준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해 주었다.
 
지난 학기 수업 시수가 너무 많아서 질식할 것 같다며 잔뜩 투덜거리며 강의를 했었는데,
이건 내 강의 경력을 단기간에 늘려주었다. 그래서 졸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논문을 쓰고 나서 교재를 쓸 때, 도무지 쉴 틈이 없다면서 괜히 시작했다면서 뒷목을 잡고 있었는데,
이건 내가 그쪽 방면으로 어느 정도 지식이 있고 노하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인터뷰 관련 책을 쓰고 강의를 하기 위해 공부했던 지식은 실제로 내가 면접을 볼 때 도움이 되었고,
내가 했던 스피치 관련 강의 역시 시강을 할 때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는 잘못 선택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한국어교육의 3년여의 경험까지도,
외국인 유학생들과 교환학생이 많아지면서 좋은 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의 친절 미소 훈련, 교안 작성 훈련 등이 교수법에는 도움을 줬던 것 같다.


하나님은 날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인지......
이건 내가 방학 계획표를 짜듯 월화수목금토일 구상한 스토리들이 아니었다.
순간순간 주어진 것들이었고,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몇 개의 선택들만을 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의 작품이 아니다.

믿음 좋은 엄마는 내가 어디에 지원을 했다고 했을 때에도, 그저 마음이 편하고 하나님이 잘 이끌어 주시겠지, 만약 되지 않아도 또 좋은 길을 준비해 놓고 계시겠지 하는 믿음이 굳게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 그런 믿음이 중요하다. 의심 없는 믿음이.

내가 가볍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내일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며 혼자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회개로부터 나를 가볍게 할 수 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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