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도 - 송길원 교수님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을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날아가는데

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을 부어 줄까 그래. "

거기다 나는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땜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 야, 이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gift)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 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내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은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내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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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생활 속에서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다르다.

상황이 좋을 때에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아무 상관없이 잘 살기 마련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태도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개념이라

는 생각이 든다.



송길원 교수님이 쓴 짧은 글을 보면서, 그 동안 무뎌졌던 "spiritual power"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사람을 볼 때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우리 삶 속의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가치를 두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둔하기에 자꾸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곤 하는 게 문제고, 'spiritual'하다는 게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지 정의하는 게 문제긴 하지만.





나도 나의 믿음을 회복해야 생활이 단단해지고 건강해질 것 같다.

기도해 주세요.

1. 눈빛

매력적인 사람, 장만옥.
눈빛이 총명하고 싱싱하다.
젊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랜다.
마흔 둘이라지?

이런 날씨엔 화양연화가 딱인데.
달콤하게 아름다운 영화, 첨밀밀도 다시 보고 싶네...




수유역 근처의 2층 양옥.
가회동 혹은 소호 분위기의 월인출판사.
내가 그리던 곳이었다.
통 창문이 있고, 창문 쪽으로 큰 책상이 있는 방.
이런 방에서는 논문도 쓱쓱 잘 써지겠다 싶었다.

그 곳에서 만난 두 사람.
분위기는 식물성인데 힘 있는 눈빛을 가진 두 사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
그 사람의 진짜 나이는 눈빛에서 나타난다.
어릴 땐 그저 쌍거풀이 있느냐, 홑겹이냐, 동그란가 길쭉한가에 불과했던 눈이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의 '속'을 보여준다. 가감없이.


나? 자신없다.
내 눈빛은 렌즈에 혹사 당하여 겉에서 보기에도 지쳐 있고,
기운이 없다.
겨우 오기로 버티고 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얼른 회복해야할텐데...




2. 말

'말'들은 얼마나 가벼운, 일시적인 약속들이며 고백인가.
수없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약속해, 약속해. 라고 말한 것들.
글씨로 쓴 것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못 미더운 말, 문자들을 철썩같이 믿어 버리는 나의 마음 구조, 뇌 구조에 있다.
어쩌면 믿음이 없었기에, '말'과 '문자'에 의존하여 믿어 버리는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다.
결국 내 마음 먹기 나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정 전날이었다.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나즈막한 아차산에 올랐다.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가끔은 심각하게 농담의 기능(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거운 상황을 피하려는 것일까? 진심은 어디에? 뭐 이런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성경에 써 있듯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니 이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한강에 짐을 좀 덜어 놓고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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