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친구랑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안 나는 허딸과 지수를 만났다. 아기 엄마이면서 전업 주부인 두 친구와 이젠 별로 공통점이 없는데도 만나면 좋고, 편하고, 헤어질 땐 아쉽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들은 지쳐가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난다.
그리고 그 엄마들은 아이들이 하는 예쁜짓과 사랑에 다시 힘을 얻어 생활해 나가는 것 같다.

솔직히, 명민한 내 친구들이 아기를 키우는 데만 전념하는 게 안타깝다.
사실 그들의 남편들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남자들보다 훨씬 총명한 애들인데.......
이런 애들이 사회 밖에서 움직여줘야 우리 다음 세대의 딸들이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텐데.
내 친구들이 육아에 대한 책임과 모성애를 발휘하느라, 한창 사회 구성원으로 능력을 쌓아갈 시기에 집 안에만 있다는 게 씁쓸하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자신의 육아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 여자는, 일

4학년 때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가서 어김없이 혼자 제사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대놓고 말씀하셨다. 내용만 간단히 줄이면, '일 하는 여자>전업 주부'였고,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엄마에게 한 방을 가하신 거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는 분했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이 다음에 커서 절대로 가정주부는 하지 않겠다고, 꼭 큰엄마처럼 의사를 하든 교수를 하든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 영향인지 뭔지 확실치는 않으나 결과적으로 난 가정주부는 '절대로' 하고 있지 않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오후 4시: 혼자서

-코엑스몰
이 곳은 예전과 다르다. 아주 아수라장 개판에 공기 오염도 최고인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가면 익숙하고, 마음이 편하니 이상도 하지. 어릴 때 놀던 곳이라 그런가보다.

; 자라 매장
서점을 가려고 갔지만, 들어가는 길목 '자라' 매장에 "SALE"이 신나게 걸려있는 걸 보고 들어갔다. 이옷저옷 만지작거리다가 50%하는 웃옷 하나를 사 가지고 왔다. 간만의 이런 쇼핑, 재밌었다. 이상하게 이 매장에 온 여자들과 소수의 남자들은 자신이 무슨 패션에 있어서는 한가닥하는 냥 껍쭉거리며 돌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나 외국 물 좀 먹었어요' 하는 몸짓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세련되기도 했고, 한편 경박하고 비어 보이는 애들도 많다. 여기 옷이 내 취향이 아닌 것처럼, 여기 사람들 역시 나를 그들 취향으로 여기지 않겠지...... 
 

; EVAN 레코드
 펫메서니 신보가 나왔길래 들을 수 있냐고 했더니, 귀엽게 생긴 점원 애가 어떤 곡을 듣고 싶냐면서 틀어주겠다고 한다. '대개 못생긴 애들은 심통이고 잘생긴 애들은 마음씨도 곱다'는 엄마와 나만의 명제를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비틀즈를 재해석한 펫매서니 곡은 기대보다는 좋았다. 하지만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하고 인위적이라는 느낌은 여전하다. 처음부터 난 이 사람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뭐랄까...'자라' 옷처럼,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애들은 이 사람을 입에 올리는 것 같다. 재주는 있으나 깊이가 없어서 항상 후반부로 갈 수록 그냥저냥, 흐지부지한 사람.

오랜만에 클래식 방에 들어가서, 에반의 좋은 스피커로 음악도 들었다.
좋은 스피커. 올 겨울 크리스마스 때, 아님 뭐 그 후에라도 좋은 놈으로 꼭 하나 사고 싶다.(물건을 칭할 때 '좋은 놈으로 하나 주세요'라는 표현은 쓰고 '좋은 년으로 장만하고 싶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 게 웃기다.ㅎㅎㅎ 사물에 우리도 모르게 남성을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에게 선물할 CD도 한 장 샀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CD를 고른 것도 오랜만이었다.


; 반디앤루이스
피노키오처럼 여기저기서 다 놀다가 목적지인 서점에 드디어 도착
역시 거울로 정신없는 교보보다 반디앤루이스가 편하다.

'개' 관련 코너에서 하늘이를 이해하기 위해 책 몇 권을 고르다 한 권을 앉아서 다 봤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유익한 정보들이 가득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말 못하는 짐승이나 의사소통 안 되는 유아나, 그들을 이해하려면 부모가 공부해야 하는 수밖엔 없을 것 같다. 하긴 애를 태 중에서 기르는 10개월 동안 이런 공부를 하면 되겠군. 그래서 하나님은 임신 기간으로 열 달을 주신 걸까?

의학 코너에 가서 아빠 백내장에 관한 책도 좀 보고, 요즘엔 그리 위험한 수술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근데 아빠의 경우엔 좀 특이한 상황이니까......
아빠가 자신의 상황이나 주위의 돌아가는 상황들에 대해 좀 더 여유로워졌음 좋겠다.
그럼 여러 가지 병들도 빨리 나을 것 같다.


여행 코너에 가서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뭔지 찾아봤다.
세계를 책으로 다 돌아다녔다.
하와이나 발리 같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놀고 쉬고 싶은 건 아니었고,
타지마할, 리장 같은 유적을 보며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리장, 시안과 같은 곳은 내겐 클리쉐 같은 곳이다.)
인도에 가서 도를 닦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북유럽 관련 책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인간답게 잘 사는 나라, 문화가 있고, 미국처럼 상스럽지도 않고(미국은 어쩔 수 없이 내겐 상스럽다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괜한 거드름이나 사치가 없는 소박한 나라, 여유로운 나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모델을 보고 경험하고 싶은 것 같다.


긴 하루였다.
放學. 학문을 놓은 첫 날. 되게 좋았다!
어쨌든 이번 학기는 내게 신입사원처럼 처음 기관에 들어가 적응한 학기였으니, 나름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다 놓아버리니, 아침이 그렇게 가볍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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