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센터 기사가 와서 TV를 말끔히 고치고 갔다. 4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 기술을 갖고 있는 자, 멋져 보인다. 난 수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간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몇 가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 질문하고 그와 관련된 대답만 취해 듣더니, 바로 기계를 바로 뜯어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 본다.

상황과 현상은 분명 다르다. 상황에는 갖은 추측이 포함되고, 필요없는 이것저것의 요소들이 장황하게 붙는다. 현상은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 몇 가지일 뿐이고. 기술자인 아저씨는 상황에 집중하고 있는 내 말을 그닥 쓸모있게 생각지 않는 듯해서, 조금 얘기하다가 스스로 끝냈다.

어쟀든 무뚝뚝하나 기술이 좋아보이는, 50대 초반쯤의 아저씨는 별 말 없이 1시간 반여를 나사를 조이고 풀고 선을 연결하면서 뚝딱였다. 그리고 선명한 화질의 TV를 내 눈 앞에 나타나게 해 주었다. 박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일 일이다. 항상 이 놈의 말이 문제인데, 내 전공도 말이고 난 이토록 무슨 일만 있으면 언어로 뭔가를 해결보려고 하니, 참 골치아픈 스타일이다.

잠언에서도 말과 관련된 구절이 계속 나오고 있다. 골자는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괴롭히기도 즐겁게하기도 한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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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것 같으나 은근히 핑계가 많고 게으른 조교와 2시에 약속을 했는데, 못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런 일이 지난 학기부터 몇 번 반복됐다. 아마 비도 오고, 자기 말대로 감기에 몸도 안 좋으니 학교에 나오기가 싫은 모양이다. 나 역시 게으른 유형이라 이런 기분을 100% 이해하기에 별 말 없이, 알겠다, 5시 30분까지만 오라고 했다.

게으른 조교를 탓할 수 없는 것이, 나 역시 내일 수업 준비를 다 못했고, 집 청소도 못 했고, 방 정리도 못했다. 그래서 아주 산만한 상태다.(저 조교도 비슷하지 않을까? 뭔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유일하게 정돈된 공간과 규칙적,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공간인 학교에 들어서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난 이런 인간이다. 뭔가 반복적으로 돌아가야지, 계속 결정할 것이 생기고 변수가 생기면 돌아버릴 것 같은 그런 인간. 따라서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려면, 미리미리 일을 해 놓아야 하고, 일의 가짓수를 벌이지 말아야 하며, 최대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과 얽히지 말아야 하고, 복잡한 일에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자. 나는 이런 종류임을.
96년. 독서실에 오전 8:20분쯤 가서, 12시에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2시쯤 독서실에 가고 새벽 2시에 집에 오는 생활. 내 계획, 목표를 향해 외부적으론 조용하지만 내적으론 뜨거웠던,단순한 그 시간들은 내 생애에서 길게 평화롭고 의미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어떤 불평불만도 없었고 마음의 밀도가 촘촘했다. 

괜히 시끄러운 사람들, 에너지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쓸데없이 얽히지 말아야겠다. 내겐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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