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으나 불순물 없이 맑고, 즐거운 분주함이었다.

양수리엔 근 2주만에 왔다.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다.
흐트러졌던 것들이 제 모습을 찾는다.
익숙했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하늘이 짖는 소리. 음식 냄새.

서울에서의 잡다구리하며 쓸데없이 복잡했던 내 일과 생각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천천히 훑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얼른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아 부모님께 안겨 드려야지 하는, 책임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아빠의 그간 쌓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엄마의 생활 모습을 보며
나도 아빠처럼만 젊고 생생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만큼만 부지런하고 담백하고 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두 분의 딸인 난, 참 무력하며 수동적으로 살고 있었구만......
하나님께 죄송하다.


양수리에서 쉬었다.


까칠하고 정신없던 머리 속이 정화되는 느낌.
하늘이는 날 보고 반갑다며 뛰어 온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런 하늘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그 큰 덩치가 펄쩍 안기는 느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늘아~~~




작년에 강남 갔던 제비는 올해도 여전히 우리집에 왔다.
'물 찬 제비'라는 말이 백 번 이해되는 제비들의 날렵하고 예쁜 모습.
일부러 지붕 밑의 제비집을 치우지 않은 주인들 덕분에 올해도 제비 한 쌍은 그곳에 터를 잡았다.

엄마랑 아빠는 한참 동안 작년의 그 제비일까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아마 작년에 우리집에서 태어난 그 새끼 제비가 자라서 여기에 온 것일거라는 둥,
제비들이 여기 오기 전 조금 튼실한 정찰병 같은 제비들이 먼저 와서 마을 정찰을 한 후, 다음날 제비들이 몰려왔다는 등....
서울 내기인 우리 부모님은 시골의 이런 것들을 어린 아이처럼 신기해 하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집 안에 들어온 풍뎅이과의 벌레를 손으로 집어 귀엽다고 말했다.
엄마는 예상했던 대로 벌레는 싫어, 징그러..라고 말했다.

꽃들이 눈 앞, 마당에 가득하고 벌들은 윙윙 거리며, 제비들은 이야기한다.
작은 꽃밭을 만들었다며 엄마가 보여주는데, 아주 조그만 싹이 나 있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해바라기는 다른 꽃들에 비해 떡잎이 아주 크시다!

하늘이 목욕 시키기, 털 빗어 주기, 귀 청소해 주기, 하늘이 집-여름 버전으로 바꾸기,
뗄감으로 있던 나무 뒤 켠으로 옮기기, 전정 가위로 잡초 잘라 내기 등 몇 가지 일을 했다.
정원 일은 엄마와 내가, 집 안 청소 설거지 겸 정리는 꼼꼼한 아빠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 자기가 잘 하는 일을 분업화하여 하고 있다.
보통의 집과는 다른 이런 풍경들이 재밌어서 엄마랑 둘이 웃었다. :D

저녁 무렵, 카메라를 귀찮아하는 내가 내 카메라를 안 가지고 온 것을 후회하며,
아빠 캠코더를 꺼내 들고 동네 산책을 나선다.
바람결에 라일락의 달콤한 향기가 스친다. 하나 찍고.
북한강변에 서 있는 싱싱한 나무도 한 장,
전깃줄에 앉아 있는 제비는 세 장,
하늘이는 수도 없이 많이 찍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빠가 찍어 놓은 사진을 보니, 꽃사과 나무에 하얀 꽃이 한가득 피어 있다. 이걸 못 본 게 아쉽네.
벚꽃과는 다른 느낌. 아주 작고 예쁜 하얀 꽃들이다. 자두나무의 꽃들도 아주아주 작은 별들처럼 붉고 예뻤다고 하던데......역시 못 봤다.


저녁을 먹는데 고기 집게를 집는 오른팔이 덜덜 떨린다.(사진을 찍을 때도 그랬다.)
푸하하...얼마나 일을 안 했음 이러냐 싶다.@@
난 아마 죽을 때에도 '운동 좀 해야하는데...'라는 멘트를 날리며 저 세상으로 갈 지도 모른다.

엄마가 해 주신 "정말 맛있는 불고기"를  휘리릭 먹고 난 후,
굉장히 빨리 설거지를 해 치운 후,
마당으로 나와 보라는 아빠 말에 나가보니 '샛별'이 떠 있다.

'개밥바라기'- 개 밥을 주고 난 후 바라보면 있다 해서 생긴 별 이름.
별 이름 치고는 재밌다며 아빠가 금성에 심취해서 말씀하신다.
과거에 보내온 빛을 우리가 8시간 후라던가?(뭐 이걸 아빠가 어떻게 계산했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사실 잘 안 들었다.ㅋㅋ)
뭐 하튼 정확한 수치는 듣고도 난 잊어버렸지만 우리는 과거에서 보내온 빛을 보면서 현재라고 말하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게 어떤 구분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난 속으로 절대시제가 아니라 상대시제의 개념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 언어학에서 시제를 3분법으로는 구분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2분법만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잠시 혼자 딴 생각.

어렸을 때도 아빠는 내게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자연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아빠의 감정과 나의 감정은 많이 닮아 있다.
아빠의 끊임없는 이야기들을 어느 때부터인가,
아니, 내가 따로 살게 된 후부터 이런 아빠를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때론 아빠는 나와 생각이 아주 비슷한 좋은 친구처럼도 느껴진다.
물론 나보다 훨씬 빛나는 생각을 하시지만.
(참고로 올해 금성은 9월 24일에 가장 밝게 빛날 것이란다. 기억해 둬야지...)

하늘에는 별이 있고,
그 하늘을 보면서 아빠는 이야기를 하셨고,
난 아빠 말을 들으며 하늘이 귀와 목을 계속 긁어 주고 있고,
하늘이는 그 커다란 덩치로 내 무릎 위에 올라 앉는다.(너무나 사랑스럽지 않은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
마음이 가볍고 든든하다.=)
건강해진 느낌이다.

내게 하나님은 얼마나 좋은 부모님을 주셨고, 좋은 가정을 주셨는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집'은 얼마나 내게 안정감을 주었던가.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일기 끝!

푸하하~ 간만에 초딩 때 쓰던 일기를 써 본 기분!
재밌네.=)


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