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30분경에 일어나 느지막히 아침을 먹었다. J는 학교를 안 가는 요즘이 그저 신나는 모양이다.
요즘은 일어나면 바로 아빠를 부른다. 잘 땐 나와 자고, 아침엔 아빠를 부르는 시스템. 왜 그럴까? 



새해가 오기 전에 수리를 해야할 것들을 끝내고 싶어서 어젯밤에 서비스 신청을 주르르 해 놨더니 11시30분경 아저씨가 왔다. 스페인어를 하는 분. 이 아파트에서 이런 서비스를 해주시는 분들은 모두 스페인어를 하고, 영어는 나 정도(?) 하는 것 같은 중미 사람들이다. 서울로 치면 논현동 정도 되는 우리 동네엔 대부분 금발에 피부가 희고 키가 농구 선수 정도 되는 백인들이 커다란 집에 산다. 이곳에 흑인은 없다. 동양인도 드문 편이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어쩌면 유일하게 다인종, 이민자들이 사는 곳일지도....

화장실에 나간 전구 2개를 갈고, 약간 깜빡이는 현상을 해결하고, 환풍기에 소리가 나는 것, 필터 청소, 드라이어 수리 등을 했다. 아저씨께 방울토마토를 씻어서 봉투에 담아 드렸다. 이런 문화가 여기에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벌써 오후 1시.
시간이 후딱 가고 있다는 데 약간 짜증이 난다. 남편과 아이를 재촉해서 어서 나가자고 했다.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cafe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이곳은 분위기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우리 동네와는 달리 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가 섞여 있어서 마음이 좀 더 편하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나이, 다양한 인종을 볼 수 있다.



J와 가보려던 새로운 Park를 찾아 나섰다. 

좀 더 북쪽으로, 또 10분 정도를 갔다. 와 보니 나와 J가 한국에서 오기 전, 1년 동안 남편이 혼자 살던 동네였다. 여긴 점심을 먹었던 동네보다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다. 카페, 감각적인 상점들, 문신을 한 아이 아빠, 유럽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 자전거....... 우리 동네에는 눈에 치일 정도로 많은 교회들이 안 보인다. 남편과 이 동네,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Donovan Park.
-꿈과 희망이 넘실거리던 곳. 허클베리핀이나 삐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나무로 만든 성이 두 채, 나무로 만든 기차가 하나 있었고, 나무들, 낮은 언덕배기, 그네가 있었다. J는 팔랑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은 쉴새 없이 뛰고 오르고 구르고, 우당탕탕 웃고, 넘어져 울기도 하고 그런다. 부모들은 이런 아이들 주위를 서성인다. 미국은 확실히 아이들에게는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면벽수도하며 1년을 살던 아파트 앞을 지나, 우리가 휴스턴에 와서 들렸던 카페에 들려 카푸치노를 마셨다. 1년 반 전도 벌써 추억이 되어 있다. 반갑다, 이곳. 카푸치노는 남편이 집에서 만들어 준 게 더 맛있었지만.

 

40대 중반이 되어 가고 있는데, 난 여전히 우리가 갔던 카페처럼 연극, 공연 팸플릿이 놓여 있고, 옷차림도 표정도 나이도 다채로운 이런 곳에 마음이 간다. 우리 동네처럼 전통적인 안정감, 보수적인 정서, 궁전 같은 집들이 있는 곳은 보기에 좋기는 하지만, 살고 싶진 않다. 취향이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차 안에서 골아 떨어진 재이를 안고 집에 들어온 시간은 저녁 7시.

오므라이스를 해서 8시에 저녁을 먹고, 10시30분경 재이와 잠이 들었다. 새벽 2시30분 기상.. 

지금은 201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새벽 5시 15분.

남편도 한 시간 전에 깨어 나와 옆에 앉아 있다.

하아- 중년 부부의 삶이 이래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새벽 시간을 각자 즐기고 있다.

 

내일은 아침엔 시리얼, 점심엔 짜장면, 저녁엔 패스추리 빵을 만들고(도전) 남편은 스테이크를 굽고,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올 한 해 가장 많이 한 생각 중 하나였다. 뭘 해 먹나, 뭘 먹나. 참 지겹기도 했는데, 이젠 그냥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2020년은, 나에 대한 의심을 벗어버릴 수 있는 한 해이기를. 
남편과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더 많은 오늘을 나누고, 내일을 이야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J에겐 온화한 모습으로, 잘 지켜봐주는 엄마가 될 수 있기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