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20분 묵상하기란 생각보다 엄청 어렵다.

아침에 큰맘 먹고 일어나 무릎 꿇고 앉았으나 다시 데구르르 옆으로 눕고.
게다가 들끓는 딴생각들 때문에 묵상은 커녕.....@@

아우-

아침에는 분주한 마음에 못하고,
밤에는 너무 피곤해서 못하고..
핑계도 가지가지.



내 머리 속이 얼마나 산만한 지 여실히 알게 됨.

오늘 밤도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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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에서 본 서울


그놈의 아침잠! 늦장을 부리다 20분 가량 영성 클래스에 늦었다.
10분 먼저 가 있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영성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 북악산으로 간다는 말에 친구는 '가서 울고 하는 것은 아니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영성'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영성'이라는 건 뭐지?

아직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건 내가 관심있는, 현재 내가 갈급하게 원하는 것들로 다가가는 길을 제시해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1. 매일매일이 새롭게, 신비롭게 느껴지는 단계가 영성의 단계라고 한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를 느끼고 깨달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당연히..., 전혀 영적이지 못한 나는 매일 아침이 새롭기는 커녕 죽을 맛이고, 신비롭기는 커녕 하루, 일주일 주기가 반복적으로 뚝딱 지나가며, 밤이면 밤마다 해야 할 것을 못하고 있다는 초조, 불안함으로 잠을 청한다.)

2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냥 후룩 마시는 게 아니라 내가 현재 이렇게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영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젠 유행어가 되어 버린 'Here and now'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그리하여 내가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라는 의미일 듯.

(난 무의식적으로 행동과 말을 던지는 경우가 많고,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래서 맨날 쓸 데 없이 분주하다.)

3. 진정한 내적인 쉼에 이르는 길

(정말 궁금하다. 잠을 잔다거나 운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어 준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잠시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행위들이 '잠시의 쉼'은 준다. 그러나 잠깐의 쉼일 뿐이다.)

4. 진정한 예배, 평안, 자유함에 이르는 길

(역시 정말 궁금하다. 진정한 평안, 자유함. 혹자는 인생이 그렇고 그런 것이라며, 특별한 거 뭐 있냐며 그냥 살라고 하지만 한번 태어난 인생, 이러한 가치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생 뭐 있어.'에 편승해 보려고도 했지만, "simple하게 살겠어."라고 말하면서 그래 나도 괜히 들쑤시지 않겠다라고 해 본 시기도 있었지만, 난 그 시기에 결코 진정으로 행복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게을렀을 뿐이지.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5. 영혼의 자유로움에 이르는 길

(난 끊임없이 '나는 이래요, 사실은 어때요, 그것은 이래요.'라면서 사회에, 다른 이에게 변명하며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스스로 매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더 관심을 갖고 그 판단에 연연해 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유롭길 바랬다니.....
 어느 곳에서든, 누구와 만나서든 여유 있으며, 당당하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6. 존재에서 나오는 평안한 에너지.

(
내 속엔 불안정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사회 생활을 할 때에는 이를 어느 정도 포장하여 안정된 척하고는 있지만..... )

예수님의 영성.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모여들었을까?
존재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평안, 평화로움이 있었기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아, 나도 내 존재에서 그런 평안한 에너지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디의 영성.
1억 5천 인구를 이끌었던 영적인 지도자.
여유, 당당함, 철학을 가지고 있던 사람.
간디는 '행치도 못하면서 지식을 배워서야 되겠냐고' 말했다. '행함'을 논했던 사람.

예수님의 영성과 간디의 영성. 이같은 '영성'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과 묵상과 기도'가 필요하다.

['명상,묵상,기도' 개념의 재정립]
 
'명상'은 '진정한 내적인 쉼'을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명상으로 우리의 존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명상의 개념이 수련의 시작이자 끝이라면, 기독교적 명상의 개념은 마음을 갈아서 기도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써 묵상과 기도를 준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기독교적 명상이란,

1. 자신을 하나님 앞에 멈추어 세우는 길이며(내 목적을 stop 시키고, 십자가 앞에서 나의 욕망을 멈춰 세워야 한다.)

2. 자기를 성찰하는 길이다.; 회개하는 것.
 회개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스스로 찔리는 양심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성찰하는 것. 그래야 회개가 가능하다.

3. 마음을 씻는 길이다.


'묵상'이란,

1. 말씀을 깨닫는 길- 각성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여,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막 4:9)
2. 말씀을 확신케 하는 길- 믿음
'믿음'은 마음의 길.(롬 10:9-10)
입으로 주를 시인하라...
네 마음이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 말씀을 자기화 하는 길-순종


목사님은 일상 생활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도 호흡을 잘 하는 것처럼 생명과 관계된 일들은 하기 쉽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 이유로 영혼의 생명을 위한 일 역시 하기 쉽다고 하셨다.
앞으로 10주, 변화되리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생각을 준비하고, 마음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할 듯하다.

*목사님이 권해 주신 첫번째 실전 훈련; 하루에 세 번, 20분, 명상과 묵상과 기도를 할 것.
(1) 무릎을 꿇고 앉아
(2) 호흡을 들이 마신 후, 다 내뿜고 잠시 숨을 멈춘다.-- 이 때, 생각도 멈출 것이다.
(3)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부른다.
(4) 조용히 묵상하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시간을 하나님께 맡긴다.

북악산 기슭. 눈이 휘날리는 날 열린 첫번째 영성 클래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다가오지는 않았다. 우리말로 보면 신비주의를 자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이성적인 뉘앙스도 풍기는 영성.

divine이 이러한 의미로 같게 사용되는지는 의문이지만 spiritual보다는 좀더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평안함을 바라고, 구원을 바라고,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성 있는 대화란? 진정성 있는 만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 지쳐서 이젠 더 이상 생각할 능력을 잃은 내게 적시에 필요했던 비타민같은 시간이었다.


제자들과 소크라테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처럼 우문현답 이 오고 갔다.


 

<화두>


1. 평안/ 구원 / 행복
 

꼭 찾아야하는 것임에도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평안, 구원,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바라보게 되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건 아니건 살면서 평안, 구원, 행복을 기대한다.

어떻게 하면 평안함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부와 명예, 성공 등이 잠시 행복함을 줄 수는 있으나 과연 지속성이 있는가?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내 마음에 지속적으로 평안을 주고 행복함을 줄 수 있는가?
 

목표 지향적이었던 스무 살 무렵의 나를 떠올려 본다. 이루고자 했던 것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에도 행복하다는 느낌은 며칠 가지 않았다. 아주 잠시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것에 으쓱했던 것 뿐이었고, 외부의 평가가 좋아졌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목표를 향해 달렸고 이루었으나 아무것도 채워 주는 것은 없다는, 허무함에 대해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 난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의존했다. 그래서 세상의 억압에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으며 휘둘리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세상의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의 억압에 붙들리다 보면 '그들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리로 저리로 휘둘리기 마련이다.


2. 탐구

사람들이 홀로 산행을 하거나 홀로 여행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사회가 만든 나의 모습이 아닌 나의 본질과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름도 나이도 없는, 가문도 직책도 없는 우주에 던져진 하나의 돌맹이처럼 그 존재 자체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절대적인 고독을 감수하면서 떠난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나, 이름 붙여지기 전의 나.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곳으로 뛰어드는 영적인
, 신앙적 용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1)      나를 만나고

2)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지금, 여기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여태껏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서 있을 때,
과거의 나-만들어져서 내부와 외부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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