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기슭. 눈이 휘날리는 날 열린 첫번째 영성 클래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다가오지는 않았다. 우리말로 보면 신비주의를 자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이성적인 뉘앙스도 풍기는 영성.

divine이 이러한 의미로 같게 사용되는지는 의문이지만 spiritual보다는 좀더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평안함을 바라고, 구원을 바라고,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성 있는 대화란? 진정성 있는 만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 지쳐서 이젠 더 이상 생각할 능력을 잃은 내게 적시에 필요했던 비타민같은 시간이었다.


제자들과 소크라테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처럼 우문현답 이 오고 갔다.


 

<화두>


1. 평안/ 구원 / 행복
 

꼭 찾아야하는 것임에도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평안, 구원,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바라보게 되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건 아니건 살면서 평안, 구원, 행복을 기대한다.

어떻게 하면 평안함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부와 명예, 성공 등이 잠시 행복함을 줄 수는 있으나 과연 지속성이 있는가?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내 마음에 지속적으로 평안을 주고 행복함을 줄 수 있는가?
 

목표 지향적이었던 스무 살 무렵의 나를 떠올려 본다. 이루고자 했던 것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에도 행복하다는 느낌은 며칠 가지 않았다. 아주 잠시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것에 으쓱했던 것 뿐이었고, 외부의 평가가 좋아졌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목표를 향해 달렸고 이루었으나 아무것도 채워 주는 것은 없다는, 허무함에 대해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 난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의존했다. 그래서 세상의 억압에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으며 휘둘리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세상의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의 억압에 붙들리다 보면 '그들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리로 저리로 휘둘리기 마련이다.


2. 탐구

사람들이 홀로 산행을 하거나 홀로 여행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사회가 만든 나의 모습이 아닌 나의 본질과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름도 나이도 없는, 가문도 직책도 없는 우주에 던져진 하나의 돌맹이처럼 그 존재 자체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절대적인 고독을 감수하면서 떠난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나, 이름 붙여지기 전의 나.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곳으로 뛰어드는 영적인
, 신앙적 용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1)      나를 만나고

2)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지금, 여기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여태껏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서 있을 때,
과거의 나-만들어져서 내부와 외부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1. 개강.
위염 증세가 도질 정도다.
학생들도 알고 있을까? 선생 역시 이렇게 학교 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머리가 (또) 복잡하여 지하철 두 정거를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건 하나님이 나를 (또!) 단련시키는 거야.
나중에도 분명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게 될테니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시키시는 거야

그래요 근시안적인 제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겠습니까.

2. 1996~2001년의 일기장.
    과거사를 돌아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불만들, 바람들, 이상들을 가지고 있는 나를 재발견했다. 진보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참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일 수도 있고, 적어도 퇴보하진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고.
 
웃음밖에 안 나와.  후훗.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리워 하는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정체성 고민을 할 필요는 없겠더군.

그 당시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 와서 보면 피식 웃게 되는,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건 미래에 대해 다시 희망을 갖게 했으며, 그간의 삶의 경로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아주 정교하게 개입하고 계셨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청사진'이라는 진부한 말이 새롭게 들리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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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전날이었다.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나즈막한 아차산에 올랐다.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가끔은 심각하게 농담의 기능(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거운 상황을 피하려는 것일까? 진심은 어디에? 뭐 이런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성경에 써 있듯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니 이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한강에 짐을 좀 덜어 놓고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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