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4명의 외부 손님이 학교에 와서 회의를 하는 거였다. 고작 4명.
그런데 3시부터 5시까지 어찌나 방방거리며 뛰어다녔는지.

빌려 놓은 회의실은 빔프로젝터가 말썽이었고, 컴퓨터가 있다고 했던 조교의 말은 거짓이었고, 그 옆 방을 빌리자니 신청서가 필요하고 인증이 필요하니 안 된다고 한다.. 열쇠는 또 다른 건물에 있는 경비실에 가서 말해야 한다 하고. 그 밖에 주차권/간식/저녁 식사 예약 확인.(정말 별 것 아닌 일인데 별 거였다.)

이 와중에 내 연구실 컴퓨터는 부팅이 안 돼서, 본관까지 하드를 떼어서 갖고 가질 않나(때마침 비는 억수로 쏟아짐) 자료 백업하려고 했는데 C 드라이브가 읽히질 않는다나 해서, 30분 계속 기다리고.


별 것 아닌 일인데, 일이 진행되는 순서를 모르고, 일을 맡은 기관들이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지를 모르니  2시간을 계속 건물과 건물,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매야 했다.

어떤 일이든(어쩜 인간관계도?) 일의 과정과 순서를 잘 알고나서 행동을 해야 괜한 고생을 안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의 과정과 순서를 잘 알아서 순조롭게 진행된 일도 하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재미나고 뿌듯하기까지 했던 발견 정도라고나 할까.

일이 아무리 전산화되고, 규격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모든 일의 주체는 사람이고, 그들은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므로 대화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대화의 진행 과정과 순서를 잘 알고만 있다면(?글쎄..이 가정은 보류다.) 무조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굴거나 혹은 뻔히 전상상 신청서가 올라와 있는데도 종이 인쇄를 해 와야 움직일 수 있다는 둥 강짜를 놓던 사람들도, 저녁 식사를 하다가 두 번이나 열쇠를 교체하러 온 경비 아저씨도(무진장 화가 나 있었다. 나라도 그랬을 듯...) 차분히 내 사정을 얘기하고, 그 사람이 화가 나 있으면 공감해 주고, 그 사람도 일하기가 힘들겠다는 점에 대해 인정해 주니 결국엔 내 편이 되어서 도와주더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 만난 각기 다른 부처의 네 사람이 기본 성정이 착한 사람들이라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돌이켜 볼 때 그들은 처음에는 1. 다혈질 로마인 2. 냉랭한 교관 3. 무기력한 놈팽이 4. 내 일 아니에요 유형이었다.

오늘 우연히 벌어진 일과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대화의 힘, 대화의 긍정적인 면을 보았다.

아까 내가 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분석해 보면, 사실 난 아주 모범적인(?) 대화를 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책에서 보던 여러 가지 이론들과 특히 협상 대화를 분석할 때 눈여겨 보았던 반응을 그대로 적용시켰던 것 같다. 어조나 몸짓도 적절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얻고자 했던 의사소통 목적을 달성한 것일 듯하다. 만약 이것들을 정리해서 제시한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화의 전략/skill'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서 제시되어야 하는 내용은, 화자의 진심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얘길 꺼내면 지나치게 도덕적인, 선생 같은 말을 한다고 할 지도 모르나, 상대에 대한 존중,상대방 입장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가 우선이다. 말이라는 표현보다는 인간에 대한 '진짜 이해'가 우선이다.(모든 인문학의 초점은 결국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에 모이는 것 아닌가?) 

물론 내가 심리학자도 영성가도 아니기에 인간성 회복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대화 분석을 통해 왜 상대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지 등에 대해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대화분석은 대화 전략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대화분석 이론은 언어를 통해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실증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다.

오늘 회의 시간에 다루었던 응급실의 대화. 면접장에서의 대화.
이 연구가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steppingstone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게다가 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이 길을 같이 걸어갈 사람이 네 명이나 있으니, 유쾌하고 든든했다. 이러 좋은 연구 기회를 주시고, 좋은 연구자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지난 금요일부터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이놈의 프로젝트라는 말 말고 뭐 다른 한국어 없을까? 새로운 연구과제?..?? 어떤 연구를 위해 이에 맞는 전문가들이 모여 일시적으로 기간을 정해 두고 협력하다가 일을 마무리하면서 해산하는 것. 이게 보통 '프로젝트'라는 말로 사용되는 듯한데.......)

연구원 여섯. 셋은 언어학자. 셋은 의료인.


그 동안 세 번의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알게 된 내 성향:

-공동연구. 혼자하는 연구보다 재밌음. '합'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 시스템 구축에 토대가 되는 기초 연구. 
-가능하다면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단기 연구.(한 아이템이 6개월 넘어가면 진 빠짐. 그 이상은 단독 연구가 나음.)
-복잡하고 추상적인 인문학자들보다는 단순하고 실질적인 이공계 사람들이 같이 일하기 편함.(기본적으로 이과 여자 성향이 있음) 
-말 많은 사람들 질색.
-정치적 인물(주로 뺀질대고 헛소리 찍찍 날림. 얼굴에 개기름도 이들의 특성 중 하나) 질색. 그러나 팀에 한 명 정도는 행정적인 일 처리하게 하려면 작업 후반부에 영입할 필요도 있을 듯도...
-과제중심적 대화 선호함.(회의 시간에 개인적 얘기하는 인간들, '이 일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이라는 울타리 표현을 쓰면서 얘기를 시작하는 인간들 매우 짜증남) 
-회의 후 밥 오래 먹는 것 싫음.(1시간 이내가 바람직. 밥 시간 피해서 만났으면 좋겠음. 팀원들 간의 친화 어쩌고가 주로 명목인데, 이런 경우 주객전도되는 경우가 더 많음. 그렇게 나랏돈 가지고 밥 먹고 술 쳐먹고 하면 안 되지.......--+) 
-인화형 리더보다는 일을 잘 분배하고 조정하는 리더 선호



이번 프로젝트 목표: 12월까지  공동논문 1편, 개인 논문 1편.
앞으로 보완점 및 주의점:
(1)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 존중해주고, 그의 의견 경청하기(경청하기란? 그가 무슨 의도로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인지, 그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할 것. 그의 표현 자체에만 매달려서 무시하지 말 것.)
(2) 팀워크 강화를 위한 역할 계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플젝도 인간이 하는 것이니 관계가 중요한 것이긴 함. 따라서 과제중심적 대화가 아니라 관계중심적 대화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함. 지나치게 딱딱하게 나가면 곤란함. 이런 면에서 내 성별이 여성이고, 유하게 보인다는 점에서는 플러스. 간식들 준비?@@

몇 달 독어 문법 공부하다가 이런 젠장, 어느 세월에 하면서 손을 뗐었는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읽어야 할 좋은 논문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

중국어는 재밌어서 계속 배우고 싶은데, 여기까진 여력이 없고.
정말 죽을 때까지 발목 잡을 것 같은 영어에 이젠 독어까지 가세한 마당이니 답답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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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학은 학교에서 정말 조용히 보낼 생각이다.
연구, 대학원 수업 준비, 독어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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