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무력함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내 상태라고 규정짓자 울음이 복받쳤다.

울음이 그치지를 않아서 결국 밖으로 나가서 대성통곡을 한 후 창피해져서 앞쪽으로 그냥 걸었다.

걷다 보니 힘도 들고...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아보니 새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걷는 소리는 무섭다. 두꺼운 파카가 서걱서걱 부딪히는 소리가 크레센도처럼 내게 다가올수록 크게 들리는데 순간 긴장하게 된다. 예전에 학생 중에서 눈이 안 보이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이렇게 긴장하고 살았겠구나 싶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가고 다시 지금 쓰고 있는 논문 생각이 났다. 오늘 할 일이 떠올랐다. 걷기와 대성통곡의 효과인가보다. 쑥쓰러움과 민망함을 안고 평화로워 보이는 공원 속 사람들을 통과해서 다시 그의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힘이 든 건 힘이 든거지... 아니 척 할 필요는 없겠지. 어쩌면 그닥 힘들지 않은 상황인데 힘들다고 말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 요즘 유행어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들 하던데, 맞는 말이지만 '헝그리 정신'과 유사한 2024년 버전인 듯하여 그닥 맘에 다가오진 않는다.

막막함과 나이듦의 무게는 생각보다 크다. 

2024.3.10.일요일, 아이의 영어학원 끝나기를 기다리며

 

 

2024년 2월 22일 새벽 0:49 

아이의 봄방학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름 철저히 대비한 겨울방학은 매일매일의 프로그램으로 뭔가 빡빡하고 뿌듯하게 채워져 나갔는데, 무방비 상태로 있던 봄방학은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진다. 아이도 그닥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 같지 않고, 나와 남편은 집에서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계속 말동무 비슷한 걸 해 가면서 하루하루가 가고 있다. 개강을 앞두고 마음은 조여오는데, 아이는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원한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아이는 키우려고 낳은 거니까.

오늘도 또 하루가 지나갔다. 25일까지 미루어진 논문 투고일이 어느새 다가오고 있고, 이것도 가능할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왔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나의 무능함을 탓할 뿐이다.

아이와 나, 그리고 남편은 흡사 코로나 때 집에 세 식구가 뭉쳐 있던 것마냥 겨울 내내 같이 있었다. 가끔은 내가 사회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는데, 오늘 다행히? 내가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체감할 만한 일이 있었다.  전공의 파업의 여파가 나에게도 미칠 줄이야. 재이 피부과에 가서 2시간 넘게 기다려서 3분가량 진료를 받고 나왔다. 퇴근 시간을 2시간 훌쩍 넘게 고군분투 중인 의사도 못할 일이지 싶고, 금요일이 무섭다고 말하는 간호사들은 웬 고생인가 싶고, 수술 앞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쩔까 싶었다. 그나마 나와 재이는 간단한 약 처방 정도, 경과 보고 정도여서 괜찮았지만, 그 옆에 산부인과, 그 앞에 폐암 센터의 환자들은 정말 어쩌란 말인가. 선거를 앞두고 갑작스레 공격해 오는 윤의 태도는 정말 후져도 참 후지다. 상대방과 타협, 적절한 조정점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일방적인 건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다. 그래서 전공의들의 사직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아이의 약한 피부는 언제 단단해질 수 있는 걸까. 만10세가 되면 정말 나아질까. 이제 만8세가 다가오는데 스카치테이프를 뜯다가 어긋나 작은 상처가 난 것도, 작은 벌레에 한번 물렸을 뿐인데도 그 자국이 한 달가량 간다. 그리고 자주 몸은 가렵다.

이런 와중, 너무 우울하고 외롭다. 난 이 시간을 잘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아이는 엄마아빠가 유명한 영웅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웅들은 다 힘들고 불우한데 자기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행복하니 영웅이 되기는 힘들겠다고 했다. 에게도 힘든 시간이 분명 있었고, 지금도 그런데 영웅이 되지 못한 까닭은 그 힘듦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냥 시간에 기대어 넘어왔기 때문이겠지 싶다. 아무리 생의 주기가 길어졌다고 하지만 내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앞으로 10년, 그 다음 10년이면 나도 70이 다 되어 간다. 재이 말대로 내가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나 족적을 남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딱 10년이다. 10년 동안 난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성실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24년 용의 해.

용의 해에 태어났고, 이름도 무관하지 않으니 상서로운 기운이 요동치는구나! 하며 1월을 시작했다.

계획을 크게 잡지 말고, 일단 한 달 살기로 한 달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라는 어떤 조언을 유튜브에서 들었다. 그래? 한번 해볼까 싶었다.

이러쿵저러쿵 이리쿵저리쿵했는데, 1월은 재이의 겨울방학과 함께 열심히 놀았다. 또렷이 기억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만, 스케이트도 일주일 타고,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에도 가고, 수영, 그림그리기, 피아노 등등...뭘 많이 하고 놀았다. 몇 번 아이의 친구 엄마들도 만났다. 뭐라고 얘기도 잘 하고 웃고 했는데, 그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행이구나 싶다. 내가 인복은 있나보다. 재이와는 24시간 붙어서 말을 엄청나게 했다. 대화라기보다는 주로 재이의 엄청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반응을 하는 식이다. 나를 닮기도 남편을 닮기도, 그 누구도 안 닮기도 한 이 작은 사람은 신기하고 귀엽다. 하! 감탄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놀랄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중년이 넘은 우리와 노년의 부모님은 아이를 보며 새로움을 느끼며 웃는다.

-엄마, 난 종이만 있으면 돼. 가장 좋은 장난감이거든. 난 장난감이 이제 필요없어. 종이만 있으면 글씨도 쓸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뭘 만들 수도 있고, 책을 만들 수도 있어.

-엄마는 어떤 향수를 만들고 싶어? 난 바람을 담은 향수를 만들고 싶어.

-난 E메이저와 A메이저가 좋아.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는 곡은 A마이너가 많더라.

-엄마, 엄마는 딱 하나만 물건을 챙기라고 하면 뭘 할거야? 난 당연히 <해리포터>야.

-엄마, 사후세계는 있어? 어떤 걸까?  난 죽음이 무서워. 엄마는 1000살까지 살아야해. 

-엄마, 난 <프라이의 꿈> 가사가 너무 좋아. 특히 이 부분!  <사건의 지평선>의 이 가사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노래는 좋아. 여전히 잘 모르겠어.

...............

아이는 이렇게 매일 새로운 것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이고, 생각하고 느끼며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이제 만 7세의 삶이다. 

갈 길과 너무 많이 남은 이 아이를 보면서 사실 난 미리 지치기도 한다. 이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고 지지하지만, 이 아이가 앞으로 겪을 수많은 일들과 변하는 세상을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게 무겁고 아플 수가 없다. 부모가 이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걸 직접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하던데, 이런 면에서 난 글러 먹은 셈이다. 디폴트값이 부정적이니.

재이와 아무런 걱정 없이 순수하게 같이 즐기는 시간은 음악을 듣고 함께 연주할 때뿐이 아닌가 싶다. 티끌만큼의 잡념도 없고, 우리 둘은 그저 악보와 멜로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다. 그건..정말 행복하고 멋진 일이다. 

 

2월이 되었다. 3일째.

재이는 영어를 배우러 가고 남편과 난 도서관. 이 패턴이 나름 고상해 보이기도 하는데,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좀 지겹기도 하다. 게다가 국립도서관의 평균 연령은 아마도 족히 65세는 될 것 같다. 은퇴한 할아버지들이 특히 많이 보이고, 왕년에 공부 좀 했을 것 같은 포쓰를 보이는 할머니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10년 후, 20년 후...아마 남편과 나도 저런 모습으로 늙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들이 그닥 재밌어 보이진 않는다.

오늘 이곳에 오며 자꾸 화가 나고 짜증이 나며 입이 앞으로 튀어 나왔다. 왜 그런지 알려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게 못마땅한가 보다. 산으로 들로 뛰쳐나가고 싶은 걸까. 오는 길 한강변에서 본 큰 사이클을 타며 막히는 길 건너로 시원하게 가는 사람이 부러웠던 걸 보면. 

앉아서. 손과 머리를 움직이며, 말로, 글로 무언가를 하는 행위가 지긋지긋하다.가 본심인가? 아니면 지금 계속 질질질질질 미친 듯이 끌고 있는 이놈의 논문 때문인가. 쓰다보니 알겠네. 이놈의 논문 때문인걸. 이 얘기를 할 때 타자 속도가 빨라지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보니.

역시, 쓰면 알 수 있다. 글의 힘이란!

얼른 쓰고 집어 던져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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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누군가 첼로로 연주하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아프네. 눈물까지 나네.(갱년기로구나. 아무 떄나 마음이 아프고 삶이 가엾고 눈물이 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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