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이 부족해서 아주 피곤한 채로 학교에 왔지만 기분이 좋다. 역시 내게 에너지를 주는 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 1순위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1) 수업 후에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와서 하는 말.

  "다음주부터 학교에 안 나올 거예요. 반수를 하려고요. 선생님께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 학생의 선한 눈매와 수줍어하며 말하는 태도에 정말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또 힘든 시간을 보내겠구나 해서 안쓰럽기도 했다. 한번 꽉 끌어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냥 어깨를 두드려주기만 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회의가 있어서 바로 나와야 됐다. 

공부하다가 힘들면 한번 찾아오라고,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는데......연락할지 모르겠다.

2) 높은 분들과(?) 회의를 했다. 높은 분들 두 분은 우리 삼촌들 연배 정도신데, 한 분은 어제 본 영화에 나온 사람처럼 셔츠 안에 예쁜 스카프도 한데다가, 배우마냥 잘 생기셨다(도대체 전공이 뭐길래...). 다른 한 분은 두부같이 생긴 분인데, 외모와는 달리 말할 때 보니 완전 총명하다!! 여튼 그 두 아저씨들을 좀 신기하게 구경을 하다가, 좋은 분들이구만 하면서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

선배 오빠 같은 선생님과 연구실 쪽으로 쭉 걸어오는데, 밥 안 먹었다, 혼자 먹었느냐 배신이다, 미안하다, 햄버거라도 사 줄까, 아니다 됐다, 어떤 종류를 좋아하느냐, 난 이게 더 맛있다, 넌 그게 더 맛있냐?, 이집 프렌치프라이엔 케찹 안 치고 먹는 게 맛있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 등의 얘기를 하다가, 풉- 좀 옛날 생각이 나서 웃었다.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이 달라졌고, 등장인물들의 머리가 좀 희어졌다는 점이 다를까, 그 외의 것들-예를 들어 봄바람이 불고, 학생식당이 있고, 공강이 있고, 새 학기고, 학관이 있는 등 '캠퍼스'가 주는 특유의 공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마디로 같.다.

 

 

스무 살, 20대, 첫사랑, 데이트, 나름 그때는 심각해던 번뇌 수준의 고민들, 봄, 계절학기, 공강 시간에 나와 보던 하늘, 벤치, 좋은 수업을 들었을 때의 두근거림, 지루한 수업을 들었을 때의 내 오만방자함 등 온갖 기억들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 생각이 나고, 웃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꿈꿀 수 있다는 점. 

 학교라는 공간에 살고 있어서 좋은 점이다.

 

서울시_자전거교통지도.pdf

봄부터 초여름까지 서울 곳곳을 누비며 다녀보리.

5월. 여린 초록색이 한창 예쁠 때, 올림픽공원에도 한번 가봐야겠다.

미풍.


엄마에게 고백했지만, 이번 가을과 추석은 제대로, 특별하게 보내고 있다.

풍성한 질감을 주는 가을 공기와 내 마음의 풍족함이 딱 일치하여 묘한 흥분 상태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다.

8월 말 증도와 화도에서 보았던, 쏟아지던 별들과 화도의 감동적인 바다.-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공에 대한 감격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도 같다.

한 해의 하반기로 가고 있다는 약간의 긴장감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좀더 바짝 피치를 올려야 한다는 기분 좋은 설레임도 있다.

맛있는 과일을 먹으면서도 가을에 대해 감탄하게 되고,
작은 꽃을 볼 때에도,
하늘색의 오묘한 빛을 볼 때에도,
학교에서 풋풋한 학생들의 모습들을 볼 때에도 기분이 좋다.


집에 오면 엄마와 하늘이가 나를 반겨준다는 사실도 이 안정감에 도움을 줬을테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일이 있고, 사는 데 불편함이 없는 수입이 있다는 것도 이 계절을 느끼게 해 준 요인 중 하나일 거다.

다음주쯤이면 양수리집도 완공이 될 것이고, 더 가을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네 식구(하늘이까지!)가 커팅식을 즐겁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아빠의 건강도 이 집이 열림과 함께 좋아질 것만 같다.


2011년 9월. 무엇보다 고질병처럼 따라 다녔던 외로움병도 없어졌고,
지금 내 상태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만족하게 되었다.(하늘이와 엄마가 떠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기혼 여성들처럼 명절에 남의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만족스러운 것 중의 하나다. 내가 저런 위치에 놓여있다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일단은 '그집'의 일을 하긴 했겠지만서도, 아마도 내부에서는 엄청 갈등을 겪었을 게 뻔하다.

이런 불편함을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싱글라이프를 누릴 수 있어서 다행스럽고,
한가위의 풍성함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어서 행복하다.
 

며칠 전, 생일. 35년 생을 꽉 채우면서 이런 안정감이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완전한 해방.
더이상 후회나 자책하는 일도 없어지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도 없어졌다.
지금이 괜찮다고 애써 자위하지도 않게 되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가 참 마음에 든다. 다가올 마흔까지의 시간이 기대가 된다.-
자존감의 회복. 기대감의 회복.

이게 엄마의 평대로 산전수전 다 겪어서 생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ㅋㅋㅋㅋ)
내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부모님과 또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기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렇게 온전하게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됐다는 건, 나 혼자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의 종류도 아니고, 시간이 흘러서 저절로 된 것도 아니다.

감사한 주일 밤이다.

이런 태평성대일수록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나의 의지와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뜻을 구하고 기도하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이 솜털 같을수록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가는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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