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오늘 몸이 아퍼서인지 스크랩해 두었던 기형도 시인에 대한 기사를 보니
마음이 확 쏠린다.

모든 걸 함축한 제목에,
담담한 어투로 절망과 상실을 얘기한다.

너댓 살  더 먹은 윤동주 같은 기형도.


스물 몇 살 땐 나약해빠진 윤동주, 게다가 요절까지 해 버린 기형도 스타일은 딱 싫었다.
(좋았지만)일부러 더 싫어했다. 슬픈 유행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삶도 비슷하게 된다는 말처럼, 나도 이들처럼 될까봐.
그때의 난 삶에 대해 나름 전투적이었고, 나름 성취지향적이었음으로.(차라리 부르르 이육사나 싸이코 이상이 맘에 들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다시 윤동주나 기형도가 좋구나.
후훗-
취향은 잘 안 바뀐다.
바꾸려해도 잘 안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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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
병원에 갔다 왔음.(이상한 목사가 많은 것처럼 이상한 의사도 많다는 것을 요즘 체감하고 있음. 하긴 선생도 이상한 사람 많으니.......)


불완전한 우리는 경험을 통해 깨지고 다듬고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불완전한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던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인생 수업(Life Lessons)>>
'인생'이라는 말과 '수업'이라는 말은, 한글로 옮겨 놓으면 유치하고 진부하고 따분하게 들린다.
하지만, 저자가 이렇게 제목을 지은 건, 진짜 사람답게 살아나가려면 매일 배우고 깨달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역설하려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기와 받아들임,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과 성취지향적으로 사는 것,
놀이와 일,
신(나에게는 하나님)과 우주의 큰 계획 속의 일부로 사는 것과 내 의지대로 사는 것.
관계 맺음과 성공적인 관계의 끝.

 
이 책의 저자들은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치에 대해 균형있게 설명해 주며,
삶 속에 녹여내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을 읽다가 마음이 꽉 차는 느낌에, 읽던 곳을 덮고 곰곰히 나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20대 때, <나무야나무야>가 삶에 대한 넓고 포근한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줬다면,
지금 이 책은 내게,
끊임없이 의문점만을 남겨주던 저 category의 가치들에 대해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지,
내가 살아가며 배워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가르쳐줬다.
 


난 내 자신이 기본적으로 낙관론자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살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껴가고 있었다.

점점 살아가면서 순수하게 기쁜 일보다는 순수하게 쓸쓸하고 슬픈 일이 많이 일어나는 듯 보였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가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력뿐만 아니라 짱짱했던 마음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뻥뻥 터지기도 하고,
애들은 30대가 되고 나니 다들 살아나가겠다면서,
'난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어, 다 그런거지, 뭐~'라는 말을 해대며,
난 이제 닳았어라는 표정(!)을 짓고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좋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마음을 줬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일이 많다. -친한 친구들이 한국을 떠나 살기도 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등...

그래서 쉴 새 없이 아기들이 태어나는 걸 보면서, 1차적으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느꼈지만,
곧, 쟤네들은 이 힘든 세상에서, 이 많은 것들을 겪으며 또 살아갈텐데,
그걸 다 아는 어른들은 왜 저렇게 애들을 낳아대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낙관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나는,
애써 세상은 살아갈만 하다고, 이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하면 못쓴다고 얘기하며 아닌척 하고 싶었다.


자아분열을 겪고 있는 내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말해 주었다.

-생명이 태어난다는 건, 신이 아직은 이 세상을 지속시킬 의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삶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도전으로 이루어진 학교입니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을 때,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미래의 나라에서 살고 여행합니다. 새 일을 시작하면, 나에게 꼭 맞는 짝을 찾게 되면, 아이가 다 크고 나면......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후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실망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미래들을 만들어 냅니다. 승진을 하고 나면, 첫아이를 갖고 나면,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얻는 기쁨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습니다. 미래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최선이든 최악이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될 때에도, 일들은 우리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쁨의 시간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상황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도 'God'을 중화시켜 '신'으로 번역을 한 것 같은데,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브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느끼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내 스스로의 힘보다 더 큰 하나님의 힘에 순종하듯,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약간 곱슬머리에 역삼각형의 얼굴, 쌍꺼풀이 없는 좁다란 눈과 언제든지 표정을 바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얄팍한 입술. 전형적인 중간 간부의 야비한 자신감과 이유 없는 대담성과 구질구질한 변명의 표정이 정확히 삼분의 일씩 나뉘어 있는 얼굴이다.

 



어차피 인생에 더 나은 것 따위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단지 더 모르는 것에 끌릴 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없어질수록 삶의 열정도 사라져간다.

-전경린(2004), '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 <<물의 정거장>>, 문학동네.



중계도서관에 갔다가 소설책을 열심히 읽는 아줌마들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도서관 대출증을 만든 기념에서인지 책 한 권을 빌려 오고 싶었다.
한 자라도 논문과 관련된 참고문헌을 더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전경린 씨는 뭉뜽그려 있어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느끼며 살고 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마음, 그리고 생각의 과정들을 정확한 단어 선택과 자연스러운 표현들로 내게 보여주었다. 하도 적나라해서 지하철에서 읽는 내내 내 마음과 생각을 다 들켜버린 것 같아 괜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슬쩍 보기도 했고, 비밀 일기를 쓰는 양 책을 내 쪽으로 당겨 읽기도 했다.




아- 소설은 정말 이런 맛에 읽는다!
소설가들은 정말 대단해!
이런 걸 통찰력이라고 하는 거겠지?



*사족: 훌륭한 input이 들어가면 output은 따라 나오는 것 같다. '훌륭한 input'은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만들어 내며 닫혀 있던 사고의 범위를 탁 트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쓰기의 스킬을 가르치는 건 그 다음의 일...
그렇다면, 내가 소논문들을 읽어도 별 output이 안 나오는 이유는? 그 논문들이 '훌룽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순 남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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