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24. 새벽 0:46 어제, 그제 주말 내내 비 오고 흐림

 

뉴스에서는 인천 지역은 성인 가슴께까지 비가 차고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어제 오늘 아이를 보며 갇혀 있다고 입이 퉁퉁 부어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에어컨까지 펑펑 틀어대면서 집이 답답하다고 투덜거렸다.

(아마도 어제 남편이 모처럼 주말 약속이 있어서 외출을 하고, 내가 재이를 온 종일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도저히 전업 주부를 하면서 아이만 키울 수는 없는 인간인 것 같다.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스럽지만, 내가 행복하지는 않다.)

 

 

이번 주는 우석이 떠나기 전 주.

재이와 나, 우석 세 사람의 첫 여름 피서가 잡혀 있고,

그는 떠나기 전 부모님 댁에 1박 2일로 다녀 오기로 했고,

대학 동창들과 저녁 모임도 잡혀 있고,

건강 검진도 하려 한다.

떠나기 전 그는 매우 분주하고,

나 역시 마음이 안 잡힌 채 싱숭생숭하다.

내 기분이 잘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

 

 

그는 오늘 짐을 조금 쌌다. 책들, 노트들을 큰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

나는 도와주기는커녕 보기가 싫어서 혼자 거실에 있다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늦은 밤, 만두를 구워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내 연구에서 통계 돌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까지 그에게 떠넘겼다.

괜한 심술이다.

 

 

 

그가 가고 난 삶이 어떨지 상상이 안 되는데, 시간은 으례 그렇듯 잘 흘러간다.

그의 말대로, 감상에 젖어 무엇하겠나.

그런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게 좋겠다.

서로에게, 또 우리 딸에게도 도움될 게 없으니.

 

나의 우울 유전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려고 자꾸 고개를 버쩍버쩍 드는데..

우울할 수는 있지만, 우울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우울해 하는 것.

늪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고쳐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또 난 이제 재이 엄마니까. 또 우석의 아내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관계망에서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니까.

 

 

우리에게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고,

그도 나도 정체되어 있지 않을 기회의 시간이고,

우리 딸에게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좋을 것이라 생각하려고 한다.

기도해야지.

나에겐... 기도라는 큰 무기가 있다.

기도하자. 잊지 말고.

 

 

그가 가고 나면,

정신 차리고,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니 빠릿빠릿하게 잘 살아봐야지.

"말만 앞서지 말고!"(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오랜만에 산마루에 예배를 보러 갔다. 

우석은 안 가고 나와 해님이 둘이 갔는데, 차 안에서 해님이에게 얘기를 해 줬다.

7개월이나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러 가는 거라고.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러 가는 거라고.



오늘 예배는 외부에서 오신 목사님의 군더더기 없이 짧은 설교였는데, 종교적인 표현으로 은혜를 받았다.

회개가 밀려왔다.


하나님이 종교적 지도자로 멈춰 있고,

필요할 때 가끔씩 꺼내보는 도구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두려움이 있어서 아닌가.

하나님을 왕으로 삼을 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칠까봐? 아니면 찾아올 변화가 싫어서?

아니면 자기가 살아온 방식, 자기 자신을 놓기 싫어서?


예수님을 내 변방에 두지 말고,(- 변방에서 어물쩡거리며 사는 삶, 별 것 없더라.)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자.

왕 되신 주로. 









 

1. 호연지기.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넓고 큰 기운"

 좀스럽지 않고, 넓~고 큰~기운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키 순으로 하면 10번을 넘어본 적이 없는 작은 애로 살아왔는데,

내 마음 속엔 늘 '용 띠'가 가진 크고 웅장하고 멋진 기운을 품은,

별로 체험한 적은 없으나 넓고 광활한 벌판이나 끝없이 펼쳐진 하늘처럼 큰 기운을 동경하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살다보니 체격도 작고, 여자고, '귀엽거나 야무진 쪽'으로 승부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잘 어울리는가 싶어서 마음 속의 큰뜻을 숨겨왔으나, 이제는 본래 생겨먹은 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마흔이니까!!!!

 

마흔부터 쉰까지.

키워드는 '호연지기'다.

좀스럽고 발발 떨어대는 발발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며, 큰 에너지들을 흡수하고 키워나가며 앞으로 10년간 살아보려고 한다. 호연지기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하고 수련해 나가고 싶다. 

 

 

출전

「공손추(公孫丑)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齊)나라의 경상(卿相)에 오르셔서 선생님의 도를 펼치실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 임금을 패왕(覇王)이 되게 하시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했다. “아니다. 내 나이 사십 세가 되어서부터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공손추가 말했다. “그러시면 선생님께서는 맹분(孟賁)보다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맹자가 말했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고자(告子)도 나보다 앞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어 맹자는 진정한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을 예로 들며 진정한 용기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이라고 말했다. ······ 그러자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의 부동심에 대하여 들려주시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고자는 ‘남이 하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기(氣)에서 구하지 말라.’고 했다.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기에서 구하지 말라 함은 옳지만, 남이 하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 함은 옳지 않다. 대저 뜻은 기의 통수(統帥)요, 기는 몸에 가득 찬 것이다. 뜻이 확립되면 기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자기의 기를 해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공손추가 말했다. “뜻이 확립되면 기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시고 나서, 또 자기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자기의 기를 해치지 말라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뜻을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기가 움직이고, 기를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곧 뜻이 움직인다. 이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달음질하는 것이 기이기는 하나, 그것이 도리어 마음을 동하게 한다.” 공손추가 말했다. “감히 묻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것을 잘하십니까?” 맹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 공손추가 말했다. “감히 묻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말로 하기가 어렵다. 그 기(氣) 됨이 다시없이 크고 다시없이 강하여 곧게 기르는 데 해(害)하는 것이 없으면 곧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는 언제나 의(義)와 도(道)에 짝하여 함께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탈이 오게 된다.”(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 曰,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고자는 맹자와 같은 시기의 사람으로 성은 고(告)이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일설에 의하면 불해(不害)라고도 한다. 고자는 유가와 묵가의 도를 겸비했다고 한다. 맹분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용사이다.

 

2. 살아갈 땐 더욱더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어느 자리건, 어떤 사람을 만나건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상대방에 따라, 자리에 따라 바뀌거나 긴장하거나 오버하거나 하지 않고.

내 중심을 정확히 갖고, 땅을 단단히 딛고 서서 나아가는 사람.

 

 

3. 연구는 촘촘하고 날카롭게

 

큰 기운, 삶의 에너지, 자연스러움, 여유로움 운운하다보면 연구자로서도 물렁해질까 해서 3번을 별도로 두었다.

 

내 연구는 앞으로 더 촘촘하게, 한 줄 한 줄 버릴 것이 없는 글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 분석과 해석은 더욱더 날카로워져야 한다.

논문을 읽다보면, 칼에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사람이 떠올릴 수 있도록.

 

삶의 양식과 일의 결과물이  맞지 않는 면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다 갖출 수 있을지 궁금하다.

 

2015. 1. 15. 목요일 @308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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