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100일. 100일의 기적이 온다는 그날이다.

그런데 뭐가?

 

 

 

재이는 두 달쯤 됐을 때부터 이미 통잠을 잤고,

밥만 제때 잘 주면 잘 자고 잘 먹고 하는 아기다. 자기 전에 잠투정이 좀 심해서 애를 먹이기는 하지만....이게 나아지려나?

 

 

오동통 살이 오른 재이는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면 웃는다.

또 안방에 걸린 파란 십자가를 보면서는 까르륵 웃기도 하고, 무당벌레 그림을 보면서도 좋아서 웃는다.

사람들이 많은 걸 좋아하고,

양수리 집을 좋아한다. 여기서 잘 자고, 먹고, 많이 웃는 걸 보면 그렇다.

외할머니의 명랑함도 좋아한다. 역시 할머니를 보면 잘 웃는 걸 봐서 그렇다.

 

 

 

졸립거나 배가 고프면 울고,

같은 자세로 앉혀 놓거나 뉘여 놓으면 운다.

내가 안을 때, 불편하면 운다.

 

 

 

엄마가 된 난,

임신 기간 중엔 우울증도 없었고, 되려 기분이 상당히 좋았었다.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기쁨이 컸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요즘은 정말 혼란스럽다.

재이에게 신경이 온통 쏠려 있게 되는데, 그게 또 좀 불안하다.

지난 1월 말 논문을 하나 투고한 이후로 내 연구는 스탑 상태이다.

아무것도 진행 중이거나 고민 중이지 않다.

원래 한 가지에만 몰빵하는 습관이 있어서일까.

균형 있게 해 나가지 못한다.

10월 말까지 논문 투고를 할 수 있을까. 올해 마지막인데.

 

 

현재 내 직위도 불안하고, 미래도 알 수 없다.

이 불안함을 뚫고 나갈 '과정'도 현재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최저 수입의 압박 또한 있다.

박사 졸업 후 처음으로 연구실을 갖고 있지 않고 지낸다.

어떻게 보면 아기 돌볼 시간이 많아졌으니 좋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그저 위안용일 뿐. 불안정함이 날 초조하게 만든다.

 

 

재이는 내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아무것도 내게 해 주는 것이 없어도,

그 존재가 BEING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사랑하고, 마음 벅찰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 줬다.

그치만, 이 깨달음과 나의 문제와는 별개다.

 

 

나의 문제.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

공허함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고 있는지 방향을 모르겠다.

매일 저녁, 아기와 놀고 먹이고 재우고 나면, 허리와 손목이 아프고 뻗어서 자야 하는 게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것.

 

항상 과정과 현재에 충실한 남편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오로지 내 몫이다. 해결해야 한다.

 

수업이 있는 날, 학교에 10시부터 나와 공부를 하려고 나오는데,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후 3시30분 수업을 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고,

그럼 재이가 기다리고 있고,

난 재이를 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렇지만 눈은 감기고 피곤하고..

주차장에서 15분씩 눈을 부치기도 하고.....

 

 

 

39주 4일.

오늘 진료가 출산 전 마지막이 되면 좋겠는데......

 

체중은 13kg 증가했고, 13~15kg 증가가 정상 범주이니 여태까지 잘 해온 셈이다.

임신 기간 내내 크게 힘든 것도 없었고,

우리 가정에 사건사고도 없었고,

무리되지 않도록 한 학기 수업 조정도 잘 되었고,

남편과도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왔다.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에벤에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돌이켜보면, 5~7개월쯤 되었을 때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해 놓았다면 좋았겠다 싶은데,

그때 몸을 사리면서 조심한 결과, 막달까지 해님이와 안전하게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위안으로 삼고 있다.

38주가 되면서 집중해서 공부를 하거나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39주가 되면서는 몸이 최고조로 무거워졌고, 해님이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차분히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조정하는 삶이 불가능해졌다.

쉽게 배가 뭉치고, 지치고, 쥐가 나고, 수면 부족이고...기타등등.

 

 

한편으론 이것도 핑계 아닌가 싶은데,

좀 더 씩씩하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사실, 

못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예전에 비하면(정상일 때에 비하면) 뭐가뭐가 안 좋으니, 못 해.

라고 못 박는 순간,

정말 아무 것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더라.

 

 

 

 

해님이를 출산하고선도 마찬가지일 거다.

출산 후 두 달은 해님이와 사귀고, 서로 익숙해지고, 내 몸을 추스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세 달 후부터는 다시 내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천천히 조율해 나가려 한다.

 

어제 읽었던 <<프랑스 아이처럼>>이 생각의 방향을 정리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균형'과 '조화'

몰두해서 일을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지 않든지 하는 습성상, 쉬운 일은 아닌데

이젠 생활을 운용해 나갈 때 '유연성'과 '조율'이 필요할 때다.

해님이에게 몰빵해서도, 그렇다고 해님이가 없었을 때처럼 살아서도 안 된다.

아무래도 손길이 필요한 해님이에게 몰빵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석 씨가 이런 조율을 잘 하고 분배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힘들 땐 도움을 구하면 될 거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할 때 '의미 있는가'나 '해야만 하는가'보다 '즐거운 일인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육아와 관련해서 이 땅의 엄마들에게는 '의미 있는가'에 대한 압박이 지나치게 심하다.

육아가 처음인 내 입장에서는, 그 잣대들에서 그리 쉽게 자유로워질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예컨대

모유수유- 해님이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가.

해님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먹이는 것- 해님이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가

해님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해님이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가

기타등등......

 

 

 

 

 

해님이도 태중에서 커가고 있고 세상에 나올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듯이,

내 인생도 2기가 시작되려는 순간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

 

 

다음 주 화요일. 예정일에 해님이는 나오려나?

열 달 동안 내 뱃속에 있던 아기를 드디어 만나게 되겠구나.

온라인에서만 얘기하며 친해진 사람과 드디어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로 한 날처럼

얼떨떨하고 설렌다. =)

 

 

* 출산은...... 아프긴 아프겠지?

  2월부터 4개월 동안 요가도 해 왔고, 호흡법도 연습했다.

  또 나와 해님이의 체중 증가도 정상 범위에 있다.

  진통이라는 게 해님이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고,

  해님이와 나, 그리고 우석이 최초로 하는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가족이 될 사람들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최초의 공동작업이랄까.

  서로를 믿고, 한번 해 보는 거지!

   

 

 

 

 

 

<38주 3일째> 2016. 6. 3. 금요일. 초여름 날씨

 

39주를 향해 달리고 있다.

우석과 해님이 이름을 뭐로 할까 간간이 얘기하고 있고,

부어오르는 손발을 사진으로 찍어 놓기도 했다.

해님이는 내가 뭘 먹거나 누워 있을 때, 잘 때, 발을 쭈욱 밀면서 꽤 강하게 움직이곤 한다.

 

 

오늘은 병원 진료일.

36주부터 매주, 그 이전엔 격주로 가던 병원도 이젠 한 번 남았다.

다음 주는 6월 11일 토요일에 진료를 예약해 두었는데, 출산 전 마지막 진료가 아닐지.

해님이는 잘 자라고 있고, 대략 3kg이 되었단다.

작은 아마씨만하던 해님이가 차근차근 성장해서 3kg까지 커주었다는 게 대견해다.

이 아이는 얼마나 열심히, 성실히, 매일매일을 살아왔을까.

토, 일, 다음 주 월, 화, 수, 목.... 태어나기까지의 며칠 동안이 해님이에겐 얼마나 긴 시간일까.

 

 

잘 할 수 있겠지. 우리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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